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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림
"네···?" 장신의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장신의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본 우펜자는 술이 확 달아났다. "나, 나는……. 아니, 난……. 나만, 아니, 어……." "네?" "미안해요." 우펜자가 갑자기 사과를 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우펜자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버렸다. "잠깐만!" 장신의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때, 때 마침 통금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를 남겨두고 자신이 어디가는 지도 모른 채 달렸다. "잠깐만!"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가 뛰어나가자 그를 뒤쫓으려 가게 밖으로 따라나갔다. 하지만 이미 그는 통금 호루라기 ..
옥실이 한숨은 장신의 남자에게 여전히 씨알도 안 먹혔다. 하지만 미행을 당한 것은 뭔가 자극제가 되었는지, 후원이라거나 남다른 식당과 술집을 간다거나 사람을 막 만나고 다니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신에, 수상하지 않은 시간대에 수상하지 않은 곳(학교나 전화가, 시장 같은 곳)을 싸돌아다니는 일은 꽤나 잦아졌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또 문제였다. 왜냐하면 장신의 남자는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차이는 날 지라도, 마타마이니 행성 어딜가도 어느정도는 먹힐 외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외양 때문에 기억에 각인되기도 쉬운데 마구 돌아다니니 옥실은 열 나서 앓아 누울 것 같았다. 게다가 우펜자를 만난답시고 학교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니 학생들도 점점 장신의 남자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
얼마 뒤, 장신의 남자는 옥실 몰래 혼자 시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휴. 그놈의 잔소리. 겨우 빠져나왔네.' 장신의 남자는 옥실이 항상 방해하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었다. 그래서 아예 딴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버리고 빠져나왔다. "어서오세요!" 시인들의 모임 장소인 식당에 도착하니 오늘은 놀랍게도 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와 있었다. "오늘은 참여자가 훨씬 많네?" "아, 오늘은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소설 같은?" "그렇지요." 장신의 남자는 문학가들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서로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면을 트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 장신의 남자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쪽에는 창문이 하나 나있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요.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죠." 옥실이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은 거야?" "위해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의심 받고 있으니 조심해야죠." 옥실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안심하며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럼 됐어." "되긴 뭘 됐다는 거에요? 준비 거의 다 됐으니 빨리 떠나요." "싫어." 장신의 남자가 음료를 마시며 말했다. "우펜자 더 보고 갈 꺼야." "아니…!" "기다려." "자꾸 이럴거에요!? 가야된다고요!" 옥실이 화를 냈다. "싫다고. 우펜자랑 이제 겨우 좀 친해졌는데 떠난다고? 안 되지, 안 돼." 장신의 남자가 옥실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한가롭게 음료를 마시며 품 속에 든 종이를 꺼냈다. "아참. 내가 시인 후원 해줬다고 문학인들 모임 초대장..
"엄청 유명한 인물이네." 장신의 남자가 이름을 듣자 바로 알아보며 말했다. "그렇죠. 유명하죠. 노래도 있어요." "나도 알아. 항구 어쩌구 눈물 어쩌구 하는 노래. 잘은 모르지만." 장신의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이런 사람은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돼?" "공연장 가시면 되겠네요. 가끔씩 단독 공연 하니까요." "아니, 그렇게 말고." "그건 꿈 깨시고. 예약 조차 가려 받고, 가려 받은 이들마저도 예약하기 어려운 기생인데 되겠어요?" "쳇. 그럼 그냥 내가 보는 공연이나 보러 다닐란다." 장신의 남자는 단념한 듯 밀했다. 그러고는 평소 자주 가는 남다른 술집에 방문했다. 한참 식사도 하고 공연을 보고 있는데, 그의 옆에 앉은 공연단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오늘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보이네요..
장신의 남자가 도서관 문 앞에서 우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들뜬 얼굴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반면, 옥실은 옆에서 계속 궁시렁대고 있었다. "어휴, 도대체가……. 난 옆에서 이렇게나 고생하는데 말이야……. 돌아갈 생각이나 하시지……." "많이 돌아다녔던데. 놀러 다니면 좋아하겠지? 그래도 많이 걷는 건 좀 그렇겠지? 차 한 대 빌릴까? 아, 근데 나 운전 할 줄 모르는데. 이참에 그냥 한 번 해볼까?"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옥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그 때 저 멀리서 우펜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신의 남자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바로 다가갔다. 우펜자가 인사했다.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어요? 학생들 가르친다고 힘들죠?" "하하……." 우펜자는 딱히 부정하..
"지금이라도 그냥 가요, 네?" 도서관에서 옥실은 몇 시간 째 장신의 남자를 계속 보채고 있었다. "싫다니까." "아니, 이거 잘못하면……." "안 해."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안 한 다고. 어차피 시간 다 됐으니까 이제 좀 조용히 해." "아니," "아 그런 짓 안 한다니까!" 결국 장신의 남자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덕분에 주변에서 책을 보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봤다. 장신의 남자는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옥실은 여전히 물러설 기색 없이 쏘아붙였다. "거봐요. 이런 데 어떻게……." "야, 그만. 나가자.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장신의 남자는 결국 도서관 밖으로 옥실을 끌고 나왔다. 옥실은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장신의 남자를 또 보챘다. "가자고요." "약속을 어떻게 깨..
"수업 끝. 주말 잘 보내요, 여러분." 우펜자가 책을 닫으며 최근에 장신의 남자에게 배운 구레아어 문장을 말했다. 발음이 아직 어눌하긴 했지만, 학생들은 바로 알아듣고 인사를 하고 각자 가방을 챙겼다. 그리곤 썰물처럼 교정을 빠져나갔다. 우펜자는 외출 준비를 해서 교정 밖으로 나가 여느 때 처럼 장신의 남자를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은 오늘도 맛있는 맛집을 돌아다니며 한 잔 했다. "오늘 알려주신 말을 써봤는데…" 우펜자가 기쁜 얼굴로 장신의 남자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했다. 두 사람은 오늘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학문적인 이야기 등등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때, "어?" 옆에 있던 잠자코 있던 옥실이 갑자기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아니에요." "뭐야, 깜짝 놀랐잖아." 장신의 남..
"그걸 왜 사?" 같이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던 현숙이 물었다. "설마 그걸 애인한테 사 줄 거야?" "아니. 내가 설마 그러겠어? 옆자리에 같이 항암치료 받는 애한테 선물로 주게." "옆자리 애?" 현숙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병원에 옆 침대 쓰는 애. 아마 난 다음 번이 마지막 치료일 것 같거든. 끝나면 이제 걔 못 볼 것 같아서 잘 지내라고 선물로 해줄 거야." 미경의 말에 현숙은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쩐지. 너무 애 같은 옷을 고르더라." "걔는 16살이거든." 미경이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앞 뒤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16살이 입기엔 너무 애기꺼 같나?" 그 때 옆에서 쇼핑을 하던 선글라스를 끼고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요즘 ..
미경은 진료실로 들어오려다 멈칫했다. "앉으시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얘기해야 하니까요." 신현석이 간호사가 가져 온 미경의 검사 결과 자료를 보며 말했다. 미경은 일단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지?" 미경의 질문에 신현석은 미경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형사님이 제 담당이니까요." "…뭐?" "아시지 않습니까? 전 이쪽 분야에서는 손에 꼽히는 사람입니다. 뭐, 요즘은 의사 일은 거의 안 하고 있지만요." 신현석은 그리 말하더니 미경을 흘끗 보며 덧붙였다. "제 뒷조사 하셨잖습니까?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미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몰랐어." "여기까지 와서 무슨 거짓말을 하십니까." "언제부터…?" "언제부터라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현석이 검사 결과..
의사의 말에 미경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미경은 검진 결과를 듣고 나와 집에 가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계속 멍한 얼굴이었다. 미경은 경황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뭘 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반장님한테 알리고 그냥 은퇴한다고 얘기해야 되나 하는 생각 등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걷다 보니 미경은 갑자기 공원을 들러서 걷고 싶어졌다. 평소라면 생각만 하고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다음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경은 공원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당신이 맞았네." 미경은 죽은 백진회에게 말했다. 미경은 큰 병원에 가보라며 의사가 준 소견서를 펼쳤다. 하마터면 백일 그룹 재단이 세운 병원을 추천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젠장. 그 소견서 버린 것 같은데." 미경이 예전에 백..
경찰 사이렌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할 만큼 시끄럽게 울렸다. 타닥타닥 하지만 미경은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눈 앞의 불길에 휩싸인 덩어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미경 형사님?" 경찰들이 이제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다가왔다. "역시 먼저 알고 와계셨군요, 선배님!"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경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분신 자살했나." 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장은 미경의 손에 들린 증거 자료를 잡아당겼다. 미경은 힘없이 그 자료를 넘겨줬다. 미경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끝이라고?" 그 때, 미경이 미처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하얀 옷을 입은 국과수 수사관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왔다. '…뭐야? 국과수에서 벌써 왔다고?' 미경이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
"…조작됐네요. 확실히." 미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더니 팔짱을 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백진회 말고 다른 쪽이 있을 수도 있겠어." "누구일까요?" "글쎄. 증거들을 숨겼을 때 가장 이들을 보는 쪽이 범인이겠지." "…그게 누굴까요?" 미경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반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민을 했지만 영 짐작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일단 저도 분석 한 걸 봐야겠어요." 미경이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훈이가 분석한 거 너네 집으로 들고 갔으니까 같이 좀 살펴보면서 생각 좀 해봐." 반장이 그리 말하고는 미경을 보냈다. 미경이 계단을 올라오는데, 임시거처 앞에 서 있던 지훈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후다닥 달려왔다. "선배님..
쿵 미경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떨림을 감추고 아닌 척 방금 초록 불로 바뀐 신호등을 건너가려 하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쟤를 왜 좋아해?" 하지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성준 또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성준이 건너가지 않고 미경의 팔을 잡았다. "…누나." "응?" "정말로 아니었으면 무슨 개소리냐고 했을 거잖아." "……." 미경에겐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가 덜 무서웠을 것이다.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미경은 차마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대답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어느새 다시 신호등은 빨간 불로 바뀌어 있었다. 미경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
"어어? 잠시만!" 미경은 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화했는데 신호만 가고 안 받으셔서 그냥 찾아왔어요. 내일 바로 제출해야 돼서요!" "무, 무슨 자료인데?" "그 백도경이… 괜찮으세요?" 지훈이 미경의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며 물었다. "아까 술 너무 많이 드셔서 그런가요? 아직 얼굴이 빨간데요? 열 나세요?" 지훈이 미경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 미경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볼을 만졌다. 지훈이 열 나는가 싶어서 만져보려 하며 말했다. "거기 갔다오셔서 아직 보고 안 하셨다 들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누구야?" 그 때 성준이 나오며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했다. "아, 둘이 본 적 있던가? 다 나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