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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대화 下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대화 下

SooyangLim 2021. 6. 21. 19:01

 장신의 남자가 도서관 문 앞에서 우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들뜬 얼굴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반면, 옥실은 옆에서 계속 궁시렁대고 있었다.

 "어휴, 도대체가……. 난 옆에서 이렇게나 고생하는데 말이야……. 돌아갈 생각이나 하시지……."
 "많이 돌아다녔던데. 놀러 다니면 좋아하겠지? 그래도 많이 걷는 건 좀 그렇겠지? 차 한 대 빌릴까? 아, 근데 나 운전 할 줄 모르는데. 이참에 그냥 한 번 해볼까?"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옥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그 때 저 멀리서 우펜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신의 남자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바로 다가갔다.
 우펜자가 인사했다.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어요? 학생들 가르친다고 힘들죠?"
 "하하……."

 우펜자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장신의 남자가 적당히 눈치를 채고 말을 돌렸다.

 "어떤 거 먹으러 가요?"
 "먹고 싶은 거 있나요? 전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잘 몰라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긴 하는데……. 제가 생각한 데가 있는 데 거기 갈래요?"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우펜자는 순간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색 않고 물었다.

 "어딘데요?"
 "오늘 안 바쁘죠?"
 "네?"
 "구경도 좀 하려는데 괜찮아요?"
 "아, 뭐……. 괜찮아요." 

 장신의 남자가 옥실에게 말했다.

 "차 좀 불러줘."
 "예이 예이."

 옥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치 비꼬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들은 택시 미터기를 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는 우주 9구역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고급 요정에 도착했다.

 "나 이런 데 와보고 싶었어."
 "네이 네이. 그러시겠죠."
 
 우펜자는 한눈에 비싼 곳임을 알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까딱하다간 식사 한 끼에 돈 다 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런 우펜자의 표정을 장신의 남자가 바로 눈치챘다. 

 "점심은 제가 살테니 좀 있다 같이 돌아보고 나서 술이나 한 잔 사 줘요."
 "술!?"

 그 말에 뒤따라 오던 옥실이 장신의 남자의 정강이를 툭 쳤다.

 "아! 뭐! 좀 마실 수도 있지! 딱 한 잔만."
 "아… 그래도 될까요?"
 "네! 저 때문에 시간 쓰는 거니까. 여긴 제가 살게요."

 장신의 남자가 해맑게 말했다.
 우펜자는 조금 안심한 듯, 하지만 어딘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장신의 남자는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뭔가… 내가 생각 했던 우펜자와는 다른데……. 낯가리는 건가?'

 장신의 남자는 왜 왔는지 알면서도 툭 던지듯 물어봤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 왔어요?"
 "네?"
 "아니… 그 다른 곳도 많은데 굳이 지금 시기에 구레아에? 들어보니 논문도 거의 다 돼 가는 단계인 것 같아서." 
 "아… 그냥 우연히……."
 "우연히?"
 "네, 우연히 신문을 보고……."
 "그렇구나."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펜자가 말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우펜자는 그를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왜 왔는지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장신의 남자 앞에서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밝게 말했다.

 "그럼 여기 잘 모르겠네? 잘 됐다. 저도 잘 모르거든요."
 "네?"
 "오늘 같이 놀러다니면 되겠네." 

 장신의 남자의 말처럼 그들은 식사 하고 나서 이곳저곳 쏘다녔다. 장에 가서 탈놀이를 구경하기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관광지도 이곳저곳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펜자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엇, 어느새 시간이……."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시계를 흘끗 보더니 자신의 시계도 꺼내 잠시 봤다. 특이하게 생긴 그의 시계 뚜껑을 본 우펜자는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 황급하게 집어넣었다. 왠지 자신의 가난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모습을 장신의 남자는 눈치채고 있었다.

 뒤에서 부루퉁한 얼굴로 하루종일 끌려다니던 옥실이 말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쉬러 가죠?"
 "아니. 안 갈껀데?"

 장신의 남자는 옥실이를 칼 같이 잘랐다. 

 "한 잔 얻어 먹기로 했으니까. 그쵸?"
 "아 진짜!"

 옥실이 짜증을내거나 말거나 장신의 남자가 갑자기 우펜자에게 말했다.

 "아, 잠시만. 기다려요. 너도 여기 기다려."
 
 장신의 남자는 옥실과 우펜자를 남겨두고 갑자기 어딘가로 뛰어갔다.

 "…어디 간 거죠?"
 "글쎄요. 걱정하진 마세요. 곧 올 거니까요."

 우펜자의 물음에 옥실은 짜증난 표정이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뭐지? 뭔가…….'

 우펜자는 옥실의 대답에 뭔가 미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상함이 뭔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신의 남자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물."

 장신의 남자가 그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우펜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좀 있다 열어보고 일단 한 잔하러 가죠?"
 "아, 네."

 우펜자는 그의 말에 상자를 열어보려다 단념했다.
 우펜자는 야채를 반죽과 함께 넓게 기름에 부치는 식당으로 갔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에휴."

 옥실은 술을 따르는 장신의 남자를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많이는 안돼요. 알죠?"
 "아, 알았어."   

 그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사발에 탄산이 있는 하얀 술을 한가득 담아서 쭉 들이켰다.
 장신의 남자는 술을 마시고는 입맛을 다셨다.

 "오? 생각한 것 보다 맛있잖아, 이거?"
 "맛이 독특하네요. 달고."
 "아 단건가?"
 "달지 않나요? 뭘로 만든 걸까요?"
  
 우펜자가 처음 먹어보는 술 맛에 신기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너도 한 잔 마실래?"
 
 장신의 남자가 옥실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우펜자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이는 좀 더 크면 마시기로 하고. 다른 거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사줄게요."
 "하하. 아이……. 뭐, 전 물만 마셔도 돼요."

 옥실이 물 잔을 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우펜자는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 사람들이 떠들며 술을 마시는 소리, 고소한 기름 음식 냄새,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즐거웠던 오늘 하루. 취기까지 살짝 오르니 몽롱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찝찝함. 
 우펜자는 마치 뭐에 홀린 듯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꺼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감사했습니다."
 "아이, 뭘 감사까지야. 즐거웠다고 하니 좋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저 같이 별 거 아닌 사람 어떻게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그저 감사합니다."
 "에이, 무슨 소릴……."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의 그 말에 얼버무리듯 대답하긴 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뭐지?'

 그때 우펜자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려 손을 뻗었다.
 장신의 남자가 자기가 따라주겠다며 만류했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라줬다. 우펜자는 술잔에 술이 차오르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어쩌다 여기 왔는지 대답 못해서 죄송해요."
 "예? 아, 아니 뭐, 괜찮아요. 누구나 각자 사정이 있는거니까."

 우펜자는 새로 채워진 잔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뭐야? 벌써 취했나?'

 장신의 남자는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다행히 우펜자는 이번에는 마시지 않고 가만히 채워진 잔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곤 슬픈 눈으로 입을 뗐다.
 
 "…제 선택으로 여기 온 거예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네?"
 "그 쪽은 제게 왜 잘해주나요? 제게 굳이 잘해줄 이유가 없는데."

 우펜자가 약간은 괴로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펜자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 취기 때문인지 뭔지 그냥 술술 흘러나왔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장신의 남자는 그 질문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예… 예?"
 "저는 그냥 가난한 집안 사람이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학위도 못 땄고, 다들 반대하는 사람인데……."
 "에이."
 "전 여기 제가 선택해서 왔어요. 근데 전 잘 모르겠어요."

 '취했네.'

 장신의 남자는 아까와 똑같은 문장을 듣자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연하게 아침에 신문을 봤는데 거기 구레아에 학교가 세워진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걸 보고 온 거예요. 그 전까지는 이런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죠. 그리고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저는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 
 "제가 왜 오게 됐는지 말해도 될까요?"
 "뭐… 편하신 대로……."

 장신의 남자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우펜자는 술을 또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데 우연히 학교 이사장과 교수님이 대화 하는 걸 듣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전 그때 그냥 듣지 말고 거기서 나왔어야 했어요. 같은 교수님 밑에서 저와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있는데, 그 후배를 빨리 학위를 따게 하기 위해서 저와 바꾸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죠."
 "와우."

 장신의 남자가 추임새를 맞추듯 영혼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펜자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당연히 저희 교수님은 거절했죠.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사장이 그런 말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했었다고."
 "……."

 장신의 남자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우펜자는 눈썹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학교를 모든 사람이 다닐 수 없고 배우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다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없는 거……. 그래도 결국 학교는 절 받아들여줬었죠. 저는 그게 학교는 절 온전히 받아들여줬다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그건 제 착각이었던 거죠."
 
 우펜자가 다시 술을 쭉 들이켰다. 장신의 남자는 말 없이 술잔을 채워줬다.
 우펜자는 말을 계속 이었다.

 "다들 반대했다더라고요. 물론 저희 교수님은 아니었지만요. 다들 반대했는데 저를 지지해주신 거였어요."
 "…고마운 분이네요."
 "그렇죠? 저는 가난하고, 온 가족이 벌어서 저의 한 학기 학비를 보태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게다가 세상의 반대를 받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 그렇다고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 근데 교수님은 절 받아주신 거였죠."
 "……."

 장신의 남자는 멍한 눈빛으로 가만히 음식을 내려다보며 우펜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우펜자는 자조적인 듯,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다.

 "근데 그 후배는 아니에요. 저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에요. 제가 살던 나라에서도 누구나 들으면 아는 손꼽히는 가문에, 젊고, 똑똑하고 장래를 촉망받는, 그리고 그만큼 밀어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죠. 그리고… 심성도 착해요. "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의 말에 내심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죠?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안 좋아진 거."
 "네, 뭐……."
 "학교는 돈이 필요 했어요. 그리고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죠. 그리고 후배의 아버지는 선거에 나가려 했고 학교에는 지원을 약속 한 것 같아요. 이해가 돼요. 이사장님도……. 학교 식구들을 고려해야 되니까. 어쨌든 그래서 대신 후배의 학위를 앞당기려고 했어요. 후배의 아버지는 후배가 학위를 일찍 따게 해서 선거에 유리하게 만들 생각인 것 같았어요."
 "…와우."

 장신의 남자는 이런 얘기에도 전혀 놀라지도 않고 그저 기계적인 감탄사만 내뱉었다.
 우펜자는 다시 술을 쭉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거절하셨지만, 이사장은 연구지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죠. 잘은 모르겠지만 교수님에게 유리하게 지원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한 말을 하더군요."
 "흐음."
 "교수님은 그런 상황에도 절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교수님의 선택은 우리 둘을 동시에 끝내려고 하셨죠."
 "같이 학위를 주려고?"
 "네. 근데··· 교수님은 너무 나이 드셨어요. 그런 일을 하시면 너무 무리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로 오게 됐어요. 다른 나라에서 연구를 하겠다고 하고 구레아까지 온 거죠."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걸 교수님은 받아들이신건가요?"
 "제가 막무가내였죠. 그냥 그러겠다고 얘기해버리고 나왔어요."

 장신의 남자가 다시 술잔을 채워줬지만, 우펜자는 그것마저도 쭉 들이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식 비웃더니 말했다.

 "그거 알아요? 떠나는 날, 전 제 평생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을 조교 월급과 연구지원금으로 받았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지금 이렇게 우리가 술을 마시고 있는 거죠. 그 돈으로……."

 장신의 남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서 술을 더 시켰다.  

 우펜자는 어느새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억눌러왔던 말들을 해서 인지 감정이 제대로 주체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빈 술잔에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다 제 선택이었어요. 근데 모르겠어요."

 우펜자가 눈물을 멈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런 짓을 왜 저지른 지도 모르겠고, 그래 놓고는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고……."

 장신의 남자는 새로 시킨 술을 말 없이 술잔에 가득 따라주며 물었다.

 "그 후배는 알고 있어요?"
 "아니요."
 "교수님하고는 대화한 게 그게 끝이에요?"
 "네."
 "안 억울해요?"
 "네?"

 우펜자가 눈을 떴다.
 몽롱해진 의식 사이로 장신의 남자가 테이블에 팔짱을 끼고 기대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얘기 중에 당신이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안 억울하냐고요."
 "……."
 "왜 그 사람들한테 얘기 안 했어요?"
 "…그건……."
 "그 사람들이 상처 입을까 봐? 그 사람들이 힘들까 봐?"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본인 아픈건 다 참아가면서 남 힘든 걸 신경 써요?"
 "그게……."
 "그 사람들이 소중하니까? 그 사람들 상처입는 걸 보는 게 싫은 건가?"
 "…제가 도망친 거죠."
 
 우펜자가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눈을 감았다.
 
 "도망? 글쎄. 그게 도망인가? 뭐, 어떤 부분에선 맞기도 한 데……."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죄를 당신이 전부 뒤집어 쓴 거지. 다들 자기 문제에서 도망쳐서 당신한테 미뤘는데 그걸 왜 다 받아줘요?"
 "네?"
 "그리고 선택? 그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나? 당신은 선택을 가장한 강요를 당한 거 아닌가? 아니에요?"
 "그건……."
 "아니 뭐, 따지자면 선택은 선택인데……. 그걸 왜 당신이 다 뒤집어썼느냐는 거죠. 본인 탓이 아니잖아. 뭐 소중한 사람이 힘든 모습을 보는 걸 피하고 싶었던 건 이해 가는데……. 굳이?"

 우펜자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장신의 남자는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후배가 잘났건, 이사장의 사정이 이해되건, 교수님이 나를 위해 주건 뭐건, 전부 그 사람들 각자 사정 아니에요? 본인이 손해 봐가면서 왜 다 짊어져요? 본인 탓도 아닌데 왜 손해를 보고 있어. 그 사람들이 그러건 말 건 뭐 어쩌라고?"  
 "……."
 "나만 없어지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건가? 그래요?"

 우펜자는 입도 뻥긋 못하고 폭격같이 쏘아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뭐, 거기까진 이미 끝난 상황이긴 하니 내가 더 할 말은 없지만……. 그러지 마요."

 장신의 남자가 좀 더 나긋하게 말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치게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저, 저는 괜찮은데……."
 "괜찮긴. 그럼 지금 이건 뭔데요?"

 장신의 남자가 안타까운 듯 하면서도 약간은 화가 섞인 표정으로 우펜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지금 뭔 짓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겠죠? 그래, 도망. 도망은 어느 정도 맞는 얘기겠네. 당신 자신에 대한 도망.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시나 우펜자씨가 그걸 희생이라 생각한다면 그거 명백하게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거 희생도 아냐. 그 사람들한테도 하면 안 되는 짓이지."

 우펜자는 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제가… 제가 잘못한 걸까요?"
 "어휴."

 장신의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잔에 채워만 놓았던 자신의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봐요."
 "네?"
 "마시면서 내 말 들어봐요."

 우펜자가 군말 없이 한 모금 마셨다.

 "당신이 가난하다고? 뭐 일도 안 하고 놀아서 가난해지기라도 했어요? 아니죠?"
 "아니…죠."
 "그럼 당신 탓 아냐."
 "어……."
 "마시면서 들으라니까요. 통금 시간 다가오니까 빨리 마시고 나가게."

 우펜자는 그 말에 급히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반대했다고요? 뭐 어쩌라고? 공부하고 싶은 게 죄인가? 나쁜 짓인가? 아니잖아. 그딴 소릴 왜 신경 써. 맞지 않아요? 교수님이 받아들여줬으면 우펜자씨 당신도 실력이 없단 얘기는 아니겠지."
 "어……."

 우펜자가 어버버 하는데 장신의 남자도 쭉 들이키더니 서로의 술잔을 채웠다. 우펜자도 그와 같이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 후배 집안이 좋다고요? 후배 아버지가 선거 나가야되서 후배 학위를 밀어준다고? 근데요? 뭔 상관이에요, 당신이랑? 왜 본인하고 비교해요? 학위? 본인이 알아서 잘해야지. 그걸로 왜 당신이 피해를 받아요?"
 "음……."
 "마셔요."

 우펜자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장신의 남자는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사장. 학교를 생각하는 이사장이 이해된다고? 그래요, 이해. 좋지. 근데 그건 이사장이고. 당신은 당신이고. 이해한다고 부당한 걸 들어줘야 돼요?"
 "……."

 우펜자는 대답 대신 눈치를 보며 술을 쭉 들이켜 마셨다.
 장신의 남자는 말을 계속 이었다.

 "교수님이 잘해주시고 본인이랑 후배랑 같이 학위 주려는 게 걱정된다고? 나이가 많아서? 그것도 교수님 사정이죠. 알아서 하시겠지. 왜 본인이 걱정해요?"
 "하, 하지만……."
 "그리고,"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잔을 마저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단숨에 들이켜 비우고 테이블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놨다.

 "마셔요."
 "아, 네."

 우펜자가 넙죽 자신의 잔을 비웠다.
 장신의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쪽이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건 말하지 못하건 말건 나한테 죄송할 필요 없어요. 말하고 말고는 본인 사정이지. 내가 알아야 할 의무라도 있어요?" 
 "……."
 "그리고 그쪽한테 잘해주고 말고는 내 맘이야. 그걸 왜 괜히 자기 조건, 자기 비하 해가면서 신경 써요? 그냥 싫으면 싫다 하면 되고, 좋으면 좋다 해요.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다 하고."
 "아, 아니에요! 안 싫어요!"
 "그럼 다행이고."

 장신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펜자의 술잔에 마지막 한 잔을 따라줬다.
 그리고는 장신의 남자가 갑자기 톤을 낮춰서 부드럽게 말했다.

 "자신감 가져요. 어제까지의 당신이 오늘도 당신일 필요는 없고, 오늘 당신이 내일도 같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살아요. 자꾸 예전일 곱씹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또 다른 선택 하면 되지. 안 그래요?"
 
 우펜자는 대답 대신 술을 쭉 들이켰다.  
 장신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통금시간 걸리겠네."

 우펜자는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일어서자 갑자기 훅 취하기 시작했다.
 장신의 남자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았다.

 "어? 괜찮아요?"

 우펜자는 그제야 술을 너무 많이 마셨음을 깨달았다.
 앞이 핑핑 돌았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 제ㄱ가 수ㄹ르 너므 마니 마셨ㄴㅔ요?"

 옥실의 짜증내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떠보니 다음날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후끈후끈한 방바닥 때문에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우펜자는 어쩐지 옷도 다 갈아입고 이불과 요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상태였다. 

 "아, 머리야……."

 우펜자는 어제 마신 술의 영향 때문인지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이마를 짚으며 주변을 보니, 옆에 어제 입고 갔던 옷이 옆에 잘 접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어제 받은 상자와 쪽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어?"

 우펜자는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신이 그렇게 술 취해서 들어와서 이렇게나 옷을 깔끔하게 잘 벗어두고 누웠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우펜자는 불길함을 안고 상자 위에 놓여있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업고 가는 중에 토해서 빨아놨음. 제 코트위에 다 토했으니 다음 주 주말에 맛있는 거 사주길 바람.」

 "맙소사."

 우펜자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무슨 짓을… 으아아아"

 그리고 어제 눈물 흘리면서 한 얘기들도 생각나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이불을 안으로 들어가 수치심에 이불킥을 했다.

 "아, 어떡하지?"

 하지만 필름이 끊기기 전, 장신의 남자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

 그는 다시 이불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옷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 상자 안에는 회중시계와 또 다른 쪽지가 있었다.

「이제 나보다 더 좋은 시계 가짐」

 우펜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이도 있구나."



 한 달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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