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림

Daydream of prime of life 30 본문

소설(Novel)/D.Q.D.(캣츠비안나이트 외전)

Daydream of prime of life 30

SooyangLim 2021. 6. 1. 19:01

 미경은 진료실로 들어오려다 멈칫했다.

 "앉으시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얘기해야 하니까요."

 신현석이 간호사가 가져 온 미경의 검사 결과 자료를 보며 말했다.
 미경은 일단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지?"
 
 미경의 질문에 신현석은 미경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형사님이 제 담당이니까요."
 "…뭐?"
 "아시지 않습니까? 전 이쪽 분야에서는 손에 꼽히는 사람입니다. 뭐, 요즘은 의사 일은 거의 안 하고 있지만요."

 신현석은 그리 말하더니 미경을 흘끗 보며 덧붙였다.

 "제 뒷조사 하셨잖습니까?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미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몰랐어."
 "여기까지 와서 무슨 거짓말을 하십니까."
 "언제부터…?"
 "언제부터라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현석이 검사 결과에서 눈을 떼고 미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일그룹 재단이 장학 재단이나 병원이 세워진 게 저 때문인데 그걸 모르시진 않으실 거고. 제가 항암 연구분야 전문가인 것도 당연히 아실 테고. 아, 제가 미경 형사님 담당이 된 시기를 물으시는 겁니까?"

 신현석이 줄줄 읊자,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기억을 못했던 미경은 말 없이 눈만 껌뻑였다.
 쏟아내듯 말을 한 신현석은 다시 미경의 검사 결과를 쳐다보며 말했다. 

 "심각하군요.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분명 회장님이 예전에 살아 계실 때 말했을 텐데."

 신현석이 그리 말하자 미경은 순간 깨우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경은 조용히 말했다.

 "…역시 당신이었군."
 
 미경의 말에 신현석이 다시 미경을 바라봤다.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당신이었어. 백진회가 뒤집어쓴 모든 죄의 진범은 당신이었어."
 "……."

 미경의 말에 신현석이 눈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잘못 짚었습니다."
 "뭐?"
 "전 어쩌다 이번에도 뒤처리를 맡은 거지 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신현석은 서랍에서 갑자기 두꺼운 서류뭉치를 꺼내 책상에 올려놨다. 그리고 미경에게 서류들을 밀며 말했다.

 "가져가시죠."
 "…이게 뭐지?"
 "전 그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거든요."
 "뭐?"

 신현석은 조용하게 말했다. 

 "저는 백진회 회장님의 이름을 더럽힌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49년 전-

 "요 꼬맹이 녀석이! 또 도둑질을 해!"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이 떠돌이 소년의 귀를 잡고는 끌고 병원 밖으로 끌어냈다.

 "무슨 일입니까?"

 젊은 날의 백진회가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에 이 소동을 목격하고는 직원에게 물었다.

 "이 놈 자식이 환자들이 선생님들 잡수시라고 가져온 감자를 훔쳐가지 않겠습니까!?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놈 자식이!"
 "아 왜! 많이 받았으면 좀 나눠 먹어도 되잖아!"

 소년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래도 이놈이! 네 애미 애비가 그리 가르치던!? 남에 꺼 훔치라고!?"
 "애미 애비 없다, 왜! 작년에 뒤져서 없어!"

 소년은 어느새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바락바락 대들었다.

 "거 째째하게 감자 하나 갖고! 너네는 맨날 배부르게 먹잖아, 이 쫌팽이 놈들아!"
 "이놈 버르장머리 봐라!"

 직원은 소년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려 했다.
 백진회가 손을 들어 직원의 행동을 막았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감자를 먹고 싶었느냐?"
 
 소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회가 손에 감자를 들고 와서 말했다.

 "훔치는 건 안된다. 달라고 부탁해야지."
 "…안 줄 거잖아."
 "줄 수도 있지."
 "그럼 줘."
 "주세요 라고 말하는 거야."
 "주세요."
 "저도 하나만 나눠 주세요 라고 하면 된단다."
 "저도 하나만 나눠 주세요."

 소년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백진회가 손에 감자를 하나 쥐어 주었다. 소년은 받자마자 뛰쳐나가려 했다. 백진회는 소년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감사합니다."
 "그래. 맛있게 먹어라."
 "이제 놔줘요."
 "등 뒤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니다. 나를 보고 얘기 해야지. 그럼 하나 더 줄 수도 있지."

 그 말에 소년은 고분고분하게 백진회를 보고 서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맛있게 먹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백진회는 자신의 손에 든 감자를 마저 다 소년에게 안겨 주었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년은 밝아진 미소로, 이번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뛰어갔다.

 "마음 아프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진회의 아내가 말했다. 그녀는 잠든 어린 딸을 안고 있었다.



 다음 날, 그 소년은 병원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얘."

 소년이 흠칫 놀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바라봤다. 백진회의 아내가 한 손에는 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이름이 뭐니?"
 "신…현석이요."
 "멋진 이름이네."

 백진회의 아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같이 먹을래?"

 백진회의 아내가 손에 고구마와 감자 가져온 바구니의 헝겊을 들추고 말했다.

 "집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좀 쪄왔는데."

 그 말에 어린 신현석은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회의 아내는 헝겊으로 신현석의 얼굴과 손에 묻은 새까만 구두약을 닦게 했다. 그리고는 감자와 고구마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신현석은 고개를 숙이고는 감사 인사를 했다.
 백진회의 아내는 옆에 앉아서 신현석과 같이 감자와 고구마를 먹었다. 신현석이 물었다.

 "아줌마도 여기 의사예요?" 
 "응. 나도 이 병원에 의사야. 넌 어디 사니?"
 "저기 다리 밑에 살아요."

 신현석은 디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비가 오면 위험할 텐데."
 "비오면 나와야죠."
 "밤에 비가 오면 어떡하니?"
 "그럼 어쩔 수 없죠."

 신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감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새 감자를 집으려는데 어린 아기의 귀여운 손이 쑥 튀어나와 집었다. 신현석이 물었다. 

 "애기는 선생님 애기예요?"
 "응. 우리 딸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딸의 손을 잡고 신현석에게 흔들며 말했다.

 "오빠 안녕~ 혜경이에요~"

 그녀의 딸은 웅얼거리며 안녕이라고 말하더니 엄마 옆으로 쏙 숨어버렸다.
 신현석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웃으며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인사해줬다.
 그녀는 그런 딸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여보, 여기 있었어?"

 그 때 백진회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 의사 선생님이랑 의사 선생님이랑……."

 신현석이 백진회와 백진회의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빠!"

 백진회의 딸이 아장아장 걸어서 백진회에게 가자 백진회가 딸을 안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딸~"

 백진회는 옆으로 와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보랑 우리 아기도 잘 있었어?"

 그 말에 신현석은 백진회의 아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기가 또 있어요?"
 "응. 뱃속에. 내년이면 나올 거야."

 백진회의 아내가 미소 지으며  신현석과 백진회에게 고구마를 건네며 말했다.
 신현석은 백진회 부부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백진회의 아내가 신현석에게 물었다.

 "맛있니?"
 "네."
 "내일도 먹고 싶니?"
 "네."
 "그럼 우리를 도와줄래? 그럼 매일 먹을 걸 줄게"
 "네?"

 백진회 아내의 말에 신현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진회가 신현석에게 말했다.

 "병원 복도와 청소를 도와줄래? 매일 청소를 도와주면 먹을 걸 줄게."
 
 그 말에 신현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병원 복도 청소도 해드릴테니까 병원 안에서 지내도 돼요?"

 그 말에 백진회의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탕비실에 방을 만들어 줄게."

 신현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매일 신현석은 병원 복도 청소와 진료실 청소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게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병원 탕비실을 나눠서 만든 방에서 생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날 밤이었다.

쾅쾅쾅

 "의사 선생님!"

 늦은 시각, 갑자기 병원에 위급한 환자가 들어왔다. 
 신현석은 급히 환자와 보호자를 병원 안에 들이고 백진회 부부에게 알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의사 선생님이 올 거에요!"

 보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쩐지 신현석은 환자를 보자마자 급체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병원에 지내면서 많은 환자를 본 탓일 것이다.
 신현석은 환자의 손을 주물러 주며 백진회를 기다렸다. 곧이어 백진회가 달려왔다.

 "급체했나봐요!"

 백진회는 신현석의 말에 순간 '어?' 하는 생각을 하며 청진기를 갖다 댔다.
 아니나다를까, 진짜 환자는 급체 했었다. 백진회는 환자에게 약과 적절한 처치를 했다. 환자는 약을 먹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안정을 되찾았다. 환자와 보호자는 연신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자 신현석이 빗물이 가득한 바닥을 닦으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신기해요. 약 먹으면 저렇게 바로 좋아지다니."
 "병에 따라 다르지만 그런 약들이 있지. 의외로 아직 세상에는 간단한 약만 먹으면 낫는 병을 약이 없어서 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단다."

 백진회의 말에 신현석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백진회에게 말했다.

 "그럼 그런 약들을 미리 많이 만들어서 팔면 똑같은 병이 있는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을 때 집에서 먹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럼 밤에 병원을 안 찾아와도 되고, 혹시나 병원이 문 닫았을 때 먹을 수 있잖아요. 안 죽어도 되고요."

 신현석의 말에 백진회가 신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쵸!?"

 백진회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을 닦고 있는 신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까 그 환자가 급체인 걸 어떻게 알았느냐?"
 "어떻게는요, 식은땀이 나고…"

 신현석은 바닥 청소를 하며 환자의 증상들을 쭉 읊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백진회는 갑자기 신현석에게 다가가 밀대 자루를 붙잡았다.

 "현석아."
 "네?"
 "내일부터 더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 학교에 가거라."

 그 말에 신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에이. 저는 제 밥 값하기만 해도 벅차요. 저는 호적도 없어서 학교에 갈 수 없어요."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결 해줄테니 학교에 가서 배우거라. 도와줄 테니 그렇게 해."  
 "어……."

 신현석은 머뭇거렸다.
 백진회가 물었다.

 "싫으냐?"
 "의사 선생님. 그럼 학교에 갈 테니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소원?"
 "아까 말한 그거 해주세요.해 주세요. 약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플 때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저희 엄마 아빠 처럼 죽지 않게요."
 "안 그래도 아까 네 말을 듣고 그럴려고 했단다."
 
 백진회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인 신현석을 꼭 안아줬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백진회의 아들 백도경이 태어났다. 그리고 백진회는 약을 만들어 팔아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래서 백진회는 제약 회사를 차려서 약을 만들어 많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신약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회사에 백진회의 아내가 찾아왔다.

 "여보~ 나 왔어~"
 "응?"
 
 백진회는 한참 신약 출시 전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교복을 입고 백진회의 회사 일을 돕고 있던 신현석은 반가운 얼굴로 백진회의 딸 혜경과 아들 도경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백진회의 아내가 병원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에 찾아 온 것이었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 때 중국집 가자."
 "중국집? 갑자기?"
 "어? 말 안 했어?" 

 백진회의 아내는 올해 막 교복을 입기 시작한 신현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날은 신현석이 전교 1등을 한 날이었다. 백진회의 아내는 신현석이 잘한 날이라 무언가 기념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셋째를 임신한 것을 알리려 한 날이었다.

 "음~ 그건 나중에 가서 얘기 직접 듣고. 어쨌든 중국집 가자."
 "뭐야? 무슨 일이야? 나 오늘 바쁜데."

 백진회가 다시 하던 일에 눈을 돌리며 말했다.

 "오래 걸려?"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래?"

 백진회의 아내는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시간 될 때 먹던지 해야지. 괜찮지?"

 백진회의 아내가 신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시간 될 때 가자."
 
 백진회는 아내를 보지 않고 일에 정신이 팔려 그렇게 말했다.
 백진회의 아내는 이제 화가 좀 난 기색이 되었다. 

 "…여보. 나 보면서 얘기 해. 기분 나빠."
 "아, 바쁘잖아. 바쁜 데 찾아와서…!"
 "……."

 백진회가 짜증을 내며 아내를 바라봤고, 백진회의 아내는 그 반응에 굉장히 마음이 상해버렸다.

 "…너무하네. 알겠어. 집에 가서 봐."

 그렇게 말하고는 백진회의 아내는 아이 둘을 안고 휙 나가버렸다.
 백진회는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괜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장님. 가보셔야 되지 않을까요?"

 신현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집에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지금은 바쁘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아내와 딸의 눈 뜬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날의 교통사고 이후로 백진회는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신약이 발표되고 세간의 호평과 함께 많은 부를 쌓았지만, 백진회는 그 부와 칭송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평생 입에 대지 않던 술과 담배를 놓지 못하게 됐다. 
 신현석은 언제나처럼 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기숙사가 아닌 백진회의 집에 들렀다.

 "……."

 신현석은 회사에도 잘 나오지 않고 거의 폐인처럼 살고 있는 백진회의 방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직 어린 백도경은 칭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언제나처럼 가족사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신현석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백도경을 백진회의 방이 아닌 다른 방에 옮겨 놨다. 신현석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술병과 사진들을 치우고, 술병처럼 쓰러져 있는 백진회를 끌어서 이부자리에 옮겼다.
 그때 갑자기 백진회가 신현석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도 아팠냐."
 "네?"
 "너도 아팠냐. 이렇게……."
  
 신현석은 백진회가 자신의 부모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챘다.
 신현석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백진회의 팔을 잡고 떼어내며 말했다.

 "이젠 기억도 잘 안나는 부모님이 죽었을 때 보다 지금 내 눈앞에서 힘들어 하는 사장님을 보는 게 더 아픕니다."

 신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나며 말했다.

 "쉬십시오."



 며칠 뒤부터 백진회는 다시 회사에 나와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나날이 규모가 커져갔고, 어느새 백진회의 옆에는 이연자가 새로운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백진회에게는 새로운 아들들도 생겼다.

 "도경이가 동생들을 괴롭혀요."

 이연자가 말했다. 이연자는 그렇게 백도경을 다른 곳으로 격리시키게 만들었다.

 '도경이가 괴롭힌다고?'

 그 맘 때 쯤 의대를 다니고 있던 신현석은 그 일을 전해 듣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찌이이이잉

 신현석은 어느 날 대낮, 백진회의 저택으로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신현석이라고 사장님 밑에서 일 하는…"
 "아."

 신현석의 이름을 듣자 이연자는 바로 누군지 알아챘다.

철컹

 문이 열리고 마당을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연자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백도진을 안고 서 있었다. 이연자는 아주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남의 집에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별로네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아, 저기 그 도경이를 잠시 보러 왔는데요. 예전에 같이 지냈는데 오랜만에…"
 
 그 때 갑자기 집 안 쪽에서 아이 하나가 우다다다 뛰어 오더니, 플라스틱 칼을 들고 신현석 쿡쿡 찌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아아아! 죽어라! 바보 지원군이다! 머저리 백치 백도경이랑 같은 편이다!"
 
 그 아이는 백도현이었다.
 신현석은 백도현의 말에 충격 받아서 이연자를 바라봤다. 
 이연자는 다급히 백도현을 잡아끌며 말했다.

 "야! 방에 들어가!" 
 "……."

 신현석은 어안이 벙벙했다.

 "걔 지금 우리 집에 없어요. 걔 찾으려거든 애 아빠한테 가봐요. 그럼 이만 나가봐요."

 이연자는 다급하게 신현석을 쫓아내듯 내보냈다.
 하지만 신현석은 그때는 몰랐다. 동생 같은 아이들을 돌본 적은 있어도,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말과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몰랐다.

 하지만 신현석은 딴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연자나 백도현이 괴롭히면 괴롭혔지 백도경이 괴롭힐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신현석은 회사의 새로운 분야를 준비하고 있던 백진회에게 찾아갔다.

 "요즘 학교 다니느라 바쁘지?"
 "회장님만 하겠습니까. 식품 부문 새로 입성 하신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 데, 벌써 유통까지 준비하신다면서요."
 "그 쪽은 아직 멀었어. 언제 될지 몰라."
 "전에 식품도 그 소리 하시더니 몇 년 안 돼서 세우셨잖아요. 아, 요즘 새로 나온 비타민 음료 시장 반응 좋던데요? 제 말이 맞았죠? 카페인 음료랑 노선을 다르게 하는 게 맞다 했잖습니까."

 신현석의 말에 백진회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 의사 쪽은 그만두고 경영 쪽으로 공부해보는 건 어떠냐?"
 "회장님도 경영 배워서 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전 제가 하고 싶은 거 할 겁니다."
 "왜 그렇게 의사에 고집부리는지 모르겠구나. 네 능력이면 다른 거 해도 잘 먹고 잘 살 텐데." 
 
 그 말에 신현석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렇게 맘에 드시면 절 스카우트하시던가요. 월급 많이 주시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어휴. 내가 너 탕비실 거래할 때부터 알아봤다."
 "지금은 안되고요. 의사로 몇 년 근무하고 그 때 스카웃 해주시죠."
 
 그 말에 백진회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냐. 이참에 너 일 할 병원 하나 지어주마."
 "이왕 선심 쓰는 거 장학 재단도 하나 해주시죠. 대학 다녀보니까 학비가 너무 비싸더라고요."

 신현석이 뻔뻔하게 말하자 백진회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너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진단 말이야."
 "아참, 회장님." 
 "응?"
 "오늘 도경이 만나러 가봤는데 따로 산다면서요."
 "그렇게 됐다."

 신현석이 직구를 던졌다.

 "그걸 믿어요?"
 "뭘?"
 "도경이가 애들한테 해코지 할 것 같진 않은데요."
 "……."
 "전 아닌 것 같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백진회의 표정이 굳었다.

 "회장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신현석은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도경이 보러 왔는데 못 봐서 섭섭하니까 어딨는지나 알려주시죠. 잠깐 얼굴이라도 보게요."



 신현석은 백도경이 있는 집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백도경은 신현석을 보자 밝게 인사했다.

 "도경아. 형 기억해?"

 백도경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 어른 됐다!"
 "그건 나이 들어서 그래."

 신현석이 담백하게 말하고는 백도경에게 번호를 가르쳐 주며 말했다.

 "아빠 회사 번호는 알지? 이거는 형이 살고 있는 기숙사 번호거든? 까먹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여기에 연락해."
 "응."
 "자, 다시 말해 보자. 번호가 뭐라고?"

 백도경은 중얼거리며 번호를 외웠다.
 신현석은 그 후로도 종종 백도경에게 들러 안부를 확인하고 자신의 기숙사 번호를 외우게 했다. 그리고 신현석이 거처를 옮기거나 어딘가로 갈 때마다 백도경에게 전화번호를 외우게 했다.


 
 시간은 정신없이 빠르게 흘렀다. 
 신현석은 어느새 의사가 되었다.

 "선생님, 전화 왔어요."
 "누군데?"

 레지던트 2년 차. 신현석에게 어느 날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선생님 찾는데요? 좀 모자란 사람 같기도 하고…?"

 그 말에 신현석은 바로 백도경임을 눈치챘다. 신현석은 수화기를 뺏듯이 전화를 받았다.

 "도경이야?"
 "형."
 
 백도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신현석은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어?"
 "나 병원 싫어. 아빠 전화 안 받는다. 형 보고 싶어. 나 병원 싫어."
 "병원이라고?"

 신현석은 지금 백진회가 장기 해외 출장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현석은 속으로 이연자가 백진회가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신현석은 병원이라는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병원인데 나가고 싶다는 말은 함부로 나갈 수 없는 병원을 뜻하는 듯했다. 그리고 백도경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이연자가 강제로 정신병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옆에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있어?"
 "응.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
 "병실에 다른 사람은?"
 "내 방에는 나 밖에 없어. 형 나 나갈래."
 "거기 병원 이름이 뭐야?"
 "몰라."

 신현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아마 더 이상 전화를 못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젠장."

 신현석은 욕을 한 마디 내뱉었다. 그는 급히 정신병원 리스트를 쭉 뽑았다.
 그리고는 급히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 좀 도와줘. 사람 찾아야 돼. 병원에 있는지 확인만 해주면 돼." 
 
 신현석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백도경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는 급히 백진회에게 연락을 해서 백도경을 빼낼 수 있게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새벽에 급히 차를 타고 백도경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형!"

 백도경을 보자마자 신현석은 안아줬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서 백도경을 빼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백도경이 휴게소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신현석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운전만 했다. 밤새 운전을 해서 동이 트고 환해진 아침이 되었다. 신현석은 백도경을 다시 집에 데려다 놓고서야 표정을 풀었다.

 "…휴."
 
 신현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진회가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 바로 신현석을 찾아왔다.

 "미안하다."

 백진회는 신현석에게 사과했다.
 신현석은 화를 벌컥 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말 했잖습니까!"
 "……."

 백진회는 고개를 떨궜다.

 "하."

 신현석은 그런 백진회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운 듯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됐습니다. 이제 어쩔 겁니까?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 그 여자랑 계속 같이 사실겁니까?"
 
 신현석의 말에 백진회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이랑 도진이 엄마잖아……."

 백진회의 말에 신현석이 물끄러미 백진회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거 그 여자 말이죠?"
 "내 생각이기도 하네."
 
 신현석은 대답 없이 고개 숙인 백진회를 바라보다가 백진회에게 말했다.

 "회장님. 저한테 집 한 채 사주시죠."
 "뭐?"
 "그 집에서 제가 도경이 성인 될 때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있겠습니다. 봉사활동도 다니고 교육도 받고 치료도 받으면서 지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
 "성인 될 때까지 몇 년 안 남았지 않습니까. 그때 다시 회장님이 거두시더라도, 그때까지는 저랑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도 도경이가 저를 잘 따르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이번 일, 저 꽤나 고생했습니다. 보상은 해주셔야죠."

 신현석의 말에 백진회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꼭 그렇게 까지 안 해줘도 돼. 지금 넌 한참 바쁠 시기고…"
 "바쁠 시기에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그게 낫습니다."

 신현석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저도 그냥 도경이 데리고 있겠다 그건 아닙니다. 집 한 채 필요하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알겠네."

 백진회는 백도경이 원래 살던 거처를 팔고 신현석과 백도경이 같이 사는 집을 하나 사줬다. 그 일로 백진회는 이연자에게 엄청난 불평을 듣고, 결국 백도현과 백도진에게도 집을 하나씩 해주게 됐다.
 어쨌거나 백도경은 그렇게 신현석과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이 살았다. 

 백도경이 성인이 되자 신현석은 독립을 하겠다며 집을 백도경에게 내주고 나가고, 백도경은 다시 백진회가 거두게 되었다. 신현석은 다른 집에 가서 살다가 전문의를 따고 얼마 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현석이 아내 될 사람과 같이 와서 청첩장을 내밀었다.

 "회장님. 저 결혼합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시죠?"

 애인이 있다는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백진회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몰랐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 드리러 왔습니다."
 "부탁? 주례사?"

 신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모님 석에 앉아주실 수 있습니까?"

 백진회가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쩐지 약간은 벅차오르는 표정이었다.

 "나야 영광이지." 



 몇 년 뒤.
 한 사회 복지 시설.
 그 날도 백도경은 봉사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아이 씨x. ㅈ같네, 진짜. 오빠, 사회봉사 진짜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유지연이 시설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욕지거리를 섞어 가며 매니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감방 안 가고 사회봉사로 넘어 간 게 다행인 줄 알아."
 "아씨, 짱나. ㅈㄴ 재수 없게 걸려갖고."
 "불평 그만 하고. 너 몸 좀 사려."
 "아, 알았어."

 유지연은 담배를 깊게 빨며 신경질 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 또 전화했다.

 "웅~ 쟈기~ 모해?"

 유지연이 교태로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볼꺼징~? 아, 오늘 스케줄 있어? 웅~ 알겠오~"

 유지연은 일이 있어 안 된다는 상대방의 말에 실망한 듯했다. 유지연은 끊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애기, 모행~? 그래? 오늘 볼 거지?"

 그때 유지연의 시야에 시설 뒤쪽 후미진 곳에 으리으리한 외제차 한 대가 세워지는 게 보였다. 

 "웅웅. 그럼 오늘 볼 거지? ㅇㅇ역 위에 ㅁㅁ모텔? 호텔 안 가구? 으응~ 아냐. 괜찮아. 웅."

 유지연은 그 날, 우연찮게 차에서 내린 백진회가 백도경을 웃는 얼굴로 맞아주며 차에 태우는 모습을 보게 됐다.
 유지연은 전화를 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ㅈ같은 곳에 저런 대어가 있을 줄이야."



 시간은 또 흘렀다.

 신현석이 결혼하고 몇 년 뒤, 백진회가 백도경과 같이 신현석 부부를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됐다. 

 "계속 의사 일을 할 생각인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연구 쪽으로 매진하는 일을 할까 하고 생각 중입니다."

 신현석의 말에 백진회가 수저를 내려놨다. 그리고는 가져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신현석이 그 서류 봉투를 열어보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계약서."
 "스카웃 하는 겁니까?"
 "그렇네."

 신현석은 계약서를 쭉 읽어보더니 말했다.

 "…조건이 나쁘지 않군요."
 "그렇지?"

 신현석은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며칠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역시 치밀하군."
 "제가 좀 그렇죠. 전 회장님이랑 다르거든요."

 그 말에 백진회가 피식 웃었다.

 "아참. 오늘 할 말이 하나 더 있네."
 "뭐죠?"
 "도경이가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그 말에 신현석이 놀란 눈으로 백도경을 바라봤다.

 "형. 나 여자 친구 생겼다. 내년에 결혼한다."

 백도경이 웃으며 말했다.
 신현석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이름은 유지연이라고, 봉사활동 하는 곳에서 만난 모양이야."

 백진회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신현석의 아내가 유지연을 알아보고 말했다.

 "어? 연예인 아니에요? 저 이 분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은데."
 "연예인?"

 신현석이 당황하며 말했다.

 "네. 본 적 있어요. 도련님, 잘 됐네요."

 신현석의 아내가 축하하며 말했다.
 백진회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백도경은 유지연의 사진만 봐도 좋은지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 신현석의 미소는 그리 밝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집에 돌아온 신현석이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연예인이 왜 도경이랑 만나려고 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신현석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경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 했을 때 뭔가 약간… 이상하지 않아?"
 "여보가 답을 말했네. 도련님이 나쁜 사람 아니라며."

 아내의 말에 신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머릿속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찝찝함을 남긴 채 백도경은 다음 해에 결혼을 했고, 결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긴 세월과 바쁜 업무에 치며 찝찝함을 잊어버리던 어느 날, 백진회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똑똑

 "갑자기 무슨 일…회장님?"

 신현석은 백진회의 개인 사무실로 불려 갔다가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백진회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간신히 제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신 부회장. 당장 출국 준비 부탁하네."
 "네?"
 "제인이, 내 손녀… 도경이의 딸 한테서 연락이 왔어."
 
 백진회는 백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신현석은 그때 느꼈던 찝찝함이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가슴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애미란 작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말이야!"

 백진회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한바탕 쏟아낸 백진회는 쓰러지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가 된 백진회는 이제는 노하거나 눈물을 흘릴 기력도 충분치 않았다.

 "회장님. 일단은 진정, 진정하시죠."
 "내가 지금 어떻게 진정해!"
 "냉정하게 상황을 보시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인이는 아직 어립니다. 모든 말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수년 동안 본 적 없는 아이가 갑자기 나한테 직접 전화 와서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신현석이 백진회를 달래듯 말했다.

 "회장님, 속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 해보기 전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백진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 알겠네."
 "당장 갑시다. 비서에게 일정 조정하고 전세기 준비하라고 해 놓을… 아니,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행기표는 제가 예매하겠습니다. 비서에게 일정 조정만 지시 내려주십시오. 저도 지금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들은 그 날 바로 해외에 있는 백도경의 집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너무나 참담한 실정을 그들은 직접 마주하게 됐다.

 돌아오는 길, 백진회는 긴 비행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현석은 백진회가 걱정이 돼서 계속 백진회 쪽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집에 가는 차에 타고 나서야 백진회는 그간 간신히 잡고 있던 모든 것들을 놔버렸다. 그는 무너지듯 오열했다.

 "…회장님."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신현석은 집으로 가지 않고 잠시 한적한 곳으로 가려고 핸들을 꺾었다. 그들은 조용한 강가에 도착했다. 그 곳은 백진회의 첫 아내와 뱃속에 든 아이, 그리고 딸을 마지막으로 보내준 곳이었다.
 백진회는 강가에서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그런데… 
 
 "억."
 "회장님?"

 일어나려던 백진회가 갑자기 쓰러졌다. 신현석은 놀라서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쓰러진 백진회는 완전히 병석에 누워버리게 되었다.



 "…뭐야, 이건."

 신현석은 방금 받아 든 서류를 받아보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당시는 백도현이 백일제약을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T-0010010013

 텔로미어에 관한 초기 연구 약물. 그리고 이에 관련한 항암치료제 대한 실험 승인에 관해 신현석 쪽 라인 사람이 신현석에게 문서를 보여줬다.
 
 "이걸 임상 2상 승인을 내줬다고요? 미쳤습니까?"
 "아닙니다."
 "네?"
 "당연히 승인 못 받았습니다."
 "그럼 뭡니까?"
 "몰래 실험을 진행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신현석은 화를 벌컥 냈다.

 "아니, 그 놈 새x는 도대체…! 백도현이나 백도진이나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일을 저질러, 일을!"
 "부회장님. 요즘 낌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실적이 눈이 멀어 있습니다. 이걸로 실적도 쌓고, 주주와 이사회를 장악해서 부회장님을 끌어내리고 회사를 장악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

 신현석은 한숨을 쉬었다.

 "능력도 안 되는데 욕심은 많은 놈이란……."
 "당장 중단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 이사님 눈에는 그 놈이 중단하라고 하면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를 놈으로 보입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정 이사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현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정 이사에게 말했다.

 "…정 이사님. 일주일 정도 시간 드릴 테니 몰래 자료 빼 와 주십시오. 싸그리 다. 완벽하게 빼 오십시오."
 "네?"

 신현석이 정 이사가 가져온 자료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중단시켜도 이 자식이 손도 못 쓰게 옭아매 놓고 중단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정 이사가 빼온 자료를 신현석에게 들고 왔다.
 신현석은 그 자료를 보자 절로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이런 미x 새x. 당장 감방 보내야 돼, 이 새x는."
 "하지만 그러면 오너리스크가……."
 "오너는 회장님입니다. 저 놈들은 손 떼는 게 회사에 더 도움됩니다."

 신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릴 명분은 이미 차고 넘치게 충분합니다. 일단 지금 중지시키라고 하세요. 당장."
 "네."

 정 이사가 바로 지시 사항을 폰으로 전달했다.
 신현석이 다른 서류들을 작성하기 위해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이사회와 주주총회 소집합시다. 당장 자리를 날려버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회장님이 노하시지 않을까요?"
 "회장님이 이걸 아셨다면 그냥 두고 보셨겠습니까?"
 "……."
 "당장 저 놈들이 경영에 손도 못 대도록 했던 것도 회장님입니다. 지금 이 꼴이 된 게 회장님 쓰러지고 나니 아주 지들 살 판 나서 문제 아닙니까."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부회장님!"
 
 비서가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신현석은 급히 자료를 덮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비서?"
 "백도현 부사장님과 백도진 전무이사님이 회장님한테로 뭔가 수상한 것을 들고 가고 있다고 합니다. 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수상한 것이라니?"
 "그건 모르겠습니다. 좀 전에 무슨 연락받고 회장님한테로 향했다고 합니다."

 신현석은 순간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탐욕이 가득한 그들. 그리고 몇 년째 누워있는 백진회 회장. 지금 신현석이 백진회의 주치의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의 치부가 들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젠장. 설마?"

 신현석은 책상 위의 서류를 전부 서랍에 쑤셔 넣고는 급히 주차장으로 갔다. 



 백진회의 개인 병실.
 백진회가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는 병실에, 몇 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백진회의 아들들이 찾아왔다.

 "아버지~ 오랜만입니다~ 적적하셨죠?"

 백도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주사기와 약병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저희가 신약을 개발했거든요? 이게 다~ 아버지 좋아지시라고 효도하는 겁니다~"
 "야, 이거 어디다 주사해야 되는 거냐?"

 백도진이 링거줄을 살피며 말했다. 
 백도현이 주사기마다 약은 잔뜩 채워 넣으며 주사를 하는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비록 몸은 좋지 않지만 정신은 멀쩡한 백진회는 다 꺼져가는 목소리에 남은 힘을 짜내 말했다.

 "뭐…냐… 그게…?"
 "이게 무슨 약이냐면요~ 젊어지는 약입니다. 실험을 하면 좋은데 적절한 대상이 없더라고요. 아! 근데 생각해보니 나이도 많고 병석에 누워서 아~무 것도 못하고 시간 낭비나 하고 있는 우리 아버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백도현이 그렇게 바로 말하고는 다가와서 주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백진회는 저항도 못하고 그 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부작용으로 바로 죽거나, 죽을 확률이 수십 배는 높아지지만요. 아, 확률이 높아지는 건 암으로 죽을 확률입니다."

 약이 주사되자 백진회가 온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백도진이 약을 가득 채워 넣은 두 번째 주사기를 건넸다. 백도현은 주저하지 않고 약을 주입했다.

 "확실하게 해."

 백도진이 세 번째 주사기도 건넸다.
 이번에도 단번에 주사했다.

 "회사는 걱정 마시죠. 저희가 잘 이끌겠습니다."

 네 번째 주사기도,
 다섯 번째 주사기도,
 여섯 번째 주사기도…….



 신현석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회장님!"

탱그랑

 빈 약병이 하나 떨어졌다.

 "야이, 미친 새끼들아! 무슨 짓이야!"



 신현석이 가까운데 있던 백도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는 백도현에게도 주먹을 날렸다.



 두 형제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신현석은 다급히 뭔가를 해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었다. 그들은 이미 엄청난 양을 백진회의 몸에 주입한 직후였다.
 신현석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다급히 수혈팩과 링거를 조정하려는데,



 백진회가 마지막 남은 힘을 전부 짜내서 신현석의 팔을 잡아 멈추게 했다.

 "회장님…?"

 백진회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신현석의 눈에서도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미친 놈이 우리한테 주먹질을 해!"

 백도진이 몸을 일으켜 툭툭 털며 말했다.

 "됐어. 그냥 가. 저놈도 어차피 오늘이면 끝이야."

 백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 그 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안 돼… 안됩니다, 안돼요……. 저는 못 보냅니다. 이렇게는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신현석은 급하게 자신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진회는 더 이상 애쓰지 말라는 듯 신현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현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진회의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백진회는 천천히 눈을 감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신현석은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백진회 옆에 있었다. 혹시나 백진회의 임종을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신현석은 침대 옆에 엎드려 잠시 졸고 있었다. 
 백진회가 갑자기 눈을 떴다.

 "…수고 많았다, 아들아."

 그 말을 하고 백진회는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응?"

 무슨 소리를 들은 듯 해서 신현석은 번쩍 일어났다.
 하지만, 백진회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백진회는 며칠 밤낮을 깨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기적입니다. 모든 신체기관이 안정화 되신 것 같습니다."

 다른 의사가 신현석에게 검사 결과 자료들을 들고 와서 보여주며 말했다.

 "근데 못 깨어나시고 있잖아요."
 "결과 보셨잖습니까. 그냥 잠들어계신 겁니다."
 "흐음……."
 "괜찮을 겁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좀 주무시죠. 요 며칠 계속 병원에 계셨잖습니까. 그리고 요즘 회사에서 말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도와주고는 있지만 회사 일이 잔뜩 밀려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신현석 부회장을 내리려 한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회사에 갔다 오겠습니다."

 신현석은 그리 말하고 집에 들어가 잠깐 자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그 날 밤.
 밀린 일을 처리하던 신현석의 폰이 울렸다. 병원 의사에게서 온 문자였다. 신현석은 문자를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장 와보셔야겠습니다」

 신현석이 가장 우려하던 말이 적혀있었다. 신현석은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신현석이 다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다.

 "왔구나."

 그곳에는 젊어진 백진회가 침대에 앉아 있었고, 신현석과 친한 의사가 옆에 서있었다. 그는 백진회의 링거줄을 빼주고 있었다.

 "… 젊어지신 겁니까?"

 신현석이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백진회가 몸에서 탈락하고 있는 피부 조각들을 뜯어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잠시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현석이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아들놈들이 헤집어 놓은 것을 바로 잡아놔야지."
 "그 모습으로요?"
 "…도경이를 데려와야겠다."
 "네?"
 "날 좀 도와다오."

 백진회는 백도경을 이혼시키고 백도경과 백제인을 데려왔다. 그리고 자신을 숨기고 백도경으로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암이냐."
 "…네."

 백진회 저택의 개인 서재에서 백진회가 말 없이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손에는 연기가 나는 담배도 들려 있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말기구나."

 신현석은 대답을 못했다.
 백진회는 담배를 물었다가 연기를 뱉으며 물었다.

 "…도현이가 젊어지는 약과 같이 개발하던 신약을 쓰면?"
 "네?"

 백진회의 말에 신현석의 눈이 커졌다.

 "그게 가장 예후가 좋은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안다. 네가 중단시켰지. 하지만 그 항암 치료제는 관련해서 따로 다른 연구팀도 개발하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건 아직 개발 중인 약이고 고통이 너무 심해서 종종 쇼크로 인해서……."
 "이미 실험약을 투여받았는데 그런 말을 하느냐?"

 그 말에 신현석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백진회가 물었다.
 
 "진통제 제한이 풀렸지?"
 "…네."
 "지금 놓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된다. 소량씩 투여해서 늦추기라도 해보자."
 "…알겠습니다."

 신현석은 영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미경이 잠입했던 공장이 터지던 날.
 신현석은 백진회의 저택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고 술병을 깨부수고 나왔던 날.

 "지금은 안 돼요! 안정을 취하셔야 된다고…!"
 
 백제인이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신현석을 말렸다. 하지만 전혀 듣지 않고 신현석은 백진회의 서재로 들어갔다.

쾅!

 그는 미닫이 문을 부술 것처럼 거칠게 열어젖혔다.

 "지금 온 뉴스가 다 난리입니다. 대체 왜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하신 겁니까?"

 그는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대체 왜!"

 신현석은 백진회에게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왔나. 역시 자네는 항상 빨라. 이번에는 좀 느렸지만."

 백진회가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받으면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런 주제에 그는 술과 담배를 하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신현석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아쉽습니다." 

 신현석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폭발 났을 때 죽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백일제약 백도경 사망 속보 나가고, 그 뒤에 제가 그 자리 차지하면 딱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해 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백진회에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됐고,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변명? 허! 그래, 변명……."

 백진회는 자조 섞인 비웃음을 피식거리더니 웃는 듯 괴로운 듯 묘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변명이랄 게 뭐 있겠어. 내가 성급한 것도, 쥐새끼가 숨어든 것도, 누가 숨어든지 확인도 못하고 그러던 것도, 또 일이 이렇게까지 될 동안 몰랐던 것도, 그리고 내가 이 모양인 것도……. 다 내 탓이지. 안 그런가?" 

 백진회는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손으로 반 정도 사라진 독한 양주를 들며 말했다. 담배와 술을 든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혔던 자국 때문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또 링거가 꽂혀 있었다. 
 
 "……."

 신현석은 말 없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으로, 하지만 동시에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봤다. 백진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신현석에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신현석은 백진회의 손아귀에서 술병을 뺏아 냅다 들이켰다.

 그런 신현석의 모습에 놀란 백진회는 손에서 술을 빼앗긴 채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 독한 술을 순식간에 다 비운 신현석은 병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꺅!"

 백제인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게 다 당신 탓입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네?"

 신현석이 대들듯 소리쳤다. 숨도 안 고르고 술을 원샷한 탓인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정신 차리고 엎질러진 일이나 치우시죠."

 신현석이 다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면 진짜 당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신현석은 살짝 비틀거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신현석은 급하게 마신 독주 때문에 어질어질했다. 비틀거리며 주차장으로 내려와 자신의 개인 운전기사를 급히 불렀다. 그렇게 불러놓고 다리가 풀려 차 옆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하……."

 신현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모든 게 다 자기 탓이라 얘기하던 백진회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당신 탓이 아니라고요, 회장님."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신현석이 조용히 언제나 불러보고 싶었던, 혼자서 생각만 하던, 그리고 너무나 원하던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버지."

 그렇게 말하고는 운전기사가 올 때까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유지연과 차에서 얘기하던 그 날.
 대화하다가 백진회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 너 때문이잖아!"
 
 소리를 버럭 지르자 유지연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저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진회가 멈칫했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알고 있죠?"

 유지연이 다시 담배를 물며 말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왜 남한테 책임을 전가해요?" 

 그녀는 담배연기를 백진회의 얼굴에 훅 내뱉으며 말했다.
 백진회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부터 지금 내 앞에 백일제약 사장 백도경으로 나타난 것까지, 전부 다 당신 작품이잖아요. 당신이 나라는 괴물을 만든 거예요. 알잖아요?"

끼익-

 차가 멈췄다.
 차가 멈춘 곳은 공항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티켓 정도는 끊어놨겠죠?"

 대화를 들으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신현석이 유지연에게 티켓을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유지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신 부사장님."
 "별말씀을."
 "그런데 이거 뿐인가요?"
 "입 다물어주고 티켓까지 끊어드리는데 이 정도면 저희 쪽에서 후하게 인심 쓰는 겁니다. 더 원하시면 거래할 걸 가져오셔야죠."
 
 신현석의 말에 유지연은 씨익 웃었다.

 "역시 손익에 밝으시네요. 근데 어쩌죠? 전 거래할 게 없는데."
 "아직 형사한테 안 넘겼잖습니까?"
 "…어떻게 아셨을까."
 "보험은 들어놓으셨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도 손기술은 좋습니다. 그쪽과는 많이 다르지만."
 "대가는요?"

 신현석이 담배를 한 갑 건넸다.
 
 "맘에 드네요."

 유지연은 가방에서 미경의 휴대폰을 꺼내 신현석에게 건넸다. 그녀는 차문을 열고 바닥에 아까 피던 담배꽁초를 버리고 하이힐로 짓이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 안에 한 마디 던졌다.

 "지옥에서 다시 봐요."

 그리고는 쾅 소리나게 문을 닫고는 가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신현석 뒤를 돌아봤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신현석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신현석은 가만히 백진회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택으로 가겠습니다." 



 미경과 백진회가 백진회가 입원했었던 병원에서 본 날 밤.

띠리리링

 신현석은 자다 깨서 밤늦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뭡니까?"
 "부탁 좀 들어주게."
 "…술 드셨습니까? 술 드시고 부탁하면 제가 안 간다고 예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묘하게 혀가 풀린 백진회의 말소리에 신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신현석은 어느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하고 있었다.

 "깨끗이 씻고 옷 잘 갖춰 입고 오게. 이번에는 보수가 쎌 거야. 단위부터 다르게 줄 거니까."
 "가겠습니다."

 사실 이미 돈이나 웬만한 물건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신현석이었지만, 돈에 죽고 못 사는 척, 못 이기는 척 태세 전환을 하며 말했다. 



 백진회의 저택에 도착하니 백제인이 백도경이 캐리어에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해외로 보낼 생각이네."
 "네?"
 "자네는 아침에 바로 도경이 명의로 된 해임을 바로 처리해주게."

 백진회가 서류를 건넸다.

 "그리고 바로 공항에 가서 제인이와 도경이를 보내주게. 거처는 내가 잘 알아봐놨어."
 "왜 이렇게 급하게…"
 "최대한 빨라야 돼. 이연자가 아마 도현이와 도진이를 움직이게 할 거다."
 "…김미경 형사 정체를 눈치챘습니까?"

 신현석이 물었다.
 백진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바빠질 예정이니 난 집 안에 계속 있을 거다. 한동안 난 못 나갈 것 같으니 시간 날 때마다 도경이랑 제인이 잘 있는지 봐주거라."
 "앞으로 집 안에 계속 계실 거면 직접 연락하십쇼."
 "내가 전파 쓰면 꼬리 잡힐 수도 있지 않느냐?"
 "하……. 알겠습니다."

 신현석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잘 부탁한다. 김미경 형사는 꼭 치료해주고."
 "알겠습니다."
 "우선 도경이랑 제인이 짐 싸는 거나 도와주게."

 신현석은 귀찮아하면서도 백제인과 백도경이 짐 싸는 것을 도와줬다.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회사에 서류 처리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

 신현석은 회사에 나가 백도경 사장직 해임을 처리하고는 다시 돌아와 백도경과 백제인을 데리고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까지 먹여서 아침 비행기로 태워 보냈다.
 그렇게 보내 놓고 천천히 걸어 나와 차에 타서 라디오를 트는데, 휴대폰에 문자와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마침, 라디오 뉴스에서 백일 그룹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자식들 벌써 시작했군. 빨리 보내서 다행이네."

 신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때 백진회의 연락도 왔다.

 "일 터졌네요."

 신현석이 받자마자 말했다.
   
 "현석아."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신현석은 운전을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변호사한테 맡겨놨다. 고마웠다. 사랑한다. 잘 지내거라."

 그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신현석은 다급히 불렀지만 이미 통화는 끊긴 상태였다.
 신현석은 다시 걸었지만 어느새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없는 번호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신현석은 좀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변호사?"

 신현석은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신현석은 백진회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에 변호사가 이쪽으로 빨리 오라는 문자가 왔다. 신현석은 어쩔 수 없이 변호사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회장님께서 남기셨습니다."

 변호사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그렇게 얘기하면서 신현석은 봉투 안의 종이들을 펴봤다.

 그건 유서였다.
 신현석은 유서라는 두 글자를 본 순간 신현석은 급히 백진회의 집으로 뛰쳐나갔다.
 그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석양이 지고 있었다.


 
 백진회의 저택에 도착하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곳에는 벌써 경찰들과 변호사, 기자들이 몇몇이 와 있었다.

 "… 생각보다 기자들이 몇 안 왔네?"

 신현석이 중얼거렸다.  
 경찰이 신현석의 차를 보고 다가왔다.

 "신현석씨."
 "잠시만요."

 신현석이 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현석은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 책상 위에 서류 더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신현석에게 남긴 종이를 발견했다.
 형사들이 쪽지 위에 적힌 단서에 적힌 문구를 보고 추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 곳」

 신현석은 그 종이를 보고는 바로 뛰어나갔다.
 형사가 그를 붙잡았다.

 "어디가십니까?"
 "빨리 가야 됩니다."
 "어디를요?"
 "공장이요."

 그 때 다른 형사의 폰에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형사가 신현석에게 말했다.

 "…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분신 자살 했습니다."

 신현석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다리가 풀렸다.



 그리고 지금, 진료실. 
 신현석은 미경에게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오명을 벗겨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치료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미경은 조용히 말했다.

 "…며칠 전에 꿈에서 백진회가 나왔었어요."
 "그렇습니까."

 신현석은 꿈에 백진회가 나왔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꿈에 우리 부모님도 나왔는데 병원을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백진회를 가리키면서 잘한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근데 백진회는 또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무슨…?"
 "아들이 잘 한다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신현석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차올랐다.
 미경이 계속 말했다.

 "전 그때 백진회 아들들 중에는 의사가 없는데 무슨 소리지 했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아들이 당신인 것 같아요."

 신현석의 눈에서 이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아버지…!"
 
 미경은 자신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제가 모든 것을 밝혀드리겠습니다."

반응형

'소설(Novel) > D.Q.D.(캣츠비안나이트 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Quiet? Quite! Prologue  (0) 2022.02.14
Daydream of prime of life Epilogue  (0) 2021.06.02
Daydream of prime of life 29  (0) 2021.05.31
Daydream of prime of life 28  (0) 2021.05.28
Daydream of prime of life 27  (0) 2021.05.2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