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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도망의 시작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도망의 시작

SooyangLim 2021. 7. 5. 19:01

 얼마 뒤, 장신의 남자는 옥실 몰래 혼자 시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휴. 그놈의 잔소리. 겨우 빠져나왔네.'

 장신의 남자는 옥실이 항상 방해하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었다. 그래서 아예 딴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버리고 빠져나왔다.

 "어서오세요!"

 시인들의 모임 장소인 식당에 도착하니 오늘은 놀랍게도 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와 있었다.

 "오늘은 참여자가 훨씬 많네?"
 "아, 오늘은 시 뿐만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소설 같은?"
 "그렇지요."

 장신의 남자는 문학가들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서로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면을 트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

 장신의 남자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쪽에는 창문이 하나 나있었는데, 건너편에 있던 누군가가 재빨리 숨는 장면을 우연찮게 목격했다.

 "어 잠깐 이거……."

 장신의 남자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고 빠져 나오려 했다.

 "벌써 가시겠다고요?"
 "네. 그, 심부름을 시킨 게 있는데 빼 먹은, 아니 그 빠뜨린게 있어서 빨리가야 되서……."
 
 장신의 남자는 진실 반 거짓 반을 섞어가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회장 격인 사람이 그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가시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름?"
 "네. 생각해보니 전부터 이름을 못 들었잖습니까?"
 "나? 난 그냥 학생… 아니, 그 인생의 학생이란 소리고 그……."
 "네?"

 장신의 남자는 횡설수설 잠시 머뭇거리다 범백처럼 가명을 대충 지어내서 둘러댔다.

 "그… 장신. 장신이야."
 "장신? 아, 외자 이름인가요? 신?"
 "어? 어어. 그럼 난 급해서 이만……."
 
 장신의 남자는 적당히 둘러대고는 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거리를 걸어오는데 곳곳에 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확실하게, 누군가가 따라 오는 게 느껴졌다.

 '젠장. 미행까지 붙은 거야? 아니, 대체 왜? 뭘 했다고?'

 그는 지금까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억울해 했다. 그리고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가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신의 남자는 어느새 인적이 좀 드물어진 주택가로 들어섰다. 높은 담벼락을 끼고 쭉 걸어가다 그 담벼락 끝에 문이 활짝 열려있는게 보였다. 그 안에는 대궐 같은 건축물이 보였다. 그는 급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뉘슈?"

 그가 대문 뒤로 숨자 그 안에 있던 시종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네?"
 "문 열려있다고 이렇게 막 들어오면 안되쥬?"
 "저 잠시만 있다 바로 나갈게요."
 "잠시만이고 나발이고 남의 집에 이렇게 막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르나?"
 "집? 여기가 집?"

 장신의 남자는 집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 봤다. 규모가 크고 으리으리해서 당연히 공공시설이나 문화재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집이라 하니 깜짝 놀랐다.

 "무슨 집이 이리 커? 집이 아주 그냥 대궐 같네."
 
 장신의 남자가 감탄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차 한대가 스르르 오더니 그들 옆에 멈춰섰다. 뒷자석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 너!"  

 차 안에는 구레아 전통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홍화가 타고 있었다.

 "초대 받지 않는 손님이 들어오다니."
 "아이고, 죄송해유! 어서 쫓아내겠습니다!"

 시종이 화들짝 놀라 장신의 남자를 문 밖으로 밀어내려했다.

 "아, 잠깐만! 잠깐만 여기 있을게! 금방 나갈테니까!"
 "집주인이 자리를 비우는데 있겠다는 말입니까?"
 "나 지금 위험해서 그래! 잠깐이면 돼!"

 장신의 남자가 안 나가려고 버티며 소리쳤다.
 홍화가 의아한 듯 물었다.

 "위험하다니요?"
 "누가 날 따라와서 그래."
 "미행 당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응. 그러니까 그 사람들 가고 나면 바로 갈게." 

 홍화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주인이 비운 집에 외부인을 둘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 제발……."
 "차에 타시지요."
 "응?"

 홍화의 말에 장신의 남자가 벙 쪘다.

 "미행이 붙었다지 않았습니까?"
 "아. 고마워!"

 장신의 남자는 그제서야 의미를 알아듣고 냉큼 차에 탔다.
 홍화의 차에 타니 홍화의 커다랗고 풍성한 치마가 뒷자석 전체에 퍼져있었다. 때문에 장신의 남자는 치마를 살짝 밀어내고 최대한 창문에 바싹 붙어 몸을 구겨넣어야 했다.

 "그렇게 있으면 들킬텐데요?"
 "응?"
 
 홍화가 치맛자락을 들며 말했다.

 "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 어? 아,아니 그, 저……." 
 
 장신의 남자가 우물쭈물 하는데 운전기사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들입니까?"
 "으악!"

 장신의 남자가 허겁지겁 홍화의 치마 밑으로 숨었다.

똑똑

 다가온 사람들이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홍화가 태연하게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홍화씨군요."

 그들이 홍화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여기 누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은근슬쩍 차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누구요?"
 "검고 얇은 외투를 걸치고 키가 이렇게 큰 남자인데 머리가 이렇게 한 쪽으로 길고……."
 "네?"
 
 홍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비슷한 이를 못봤습니까?"
 "글쎄요. 막 나가려던 참이라 요 앞에서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집 안을 수색해봐도 되겠습니까?"
 "집을요? 떳떳하니 뒤져도 상관은 없지만, 그쪽이 무슨 권리로 제 집을 수색하겠다는 건가요? 굉장히 불쾌하네요."
 "네? 아 저, 그게 저희는……."
 
 차창 너머로 서 있던 이가 곤란해 하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9구역 소속의 경찰들도 어디선가에서 나타나 뛰어왔다.

 "모임은 해산시켰습니다. 그들도 행방은 모른다고 합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나타나자 그들이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며 말했다.

 "저희는 사실 누군가를 쫓고 있는 경찰들입니다. 잠시 수색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좋아요. 하지만 분명히 제 의사를 전달했는데 제 집을 뒤진 책임은 필히 상부에 묻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들은 움찔했다.
 하지만 제복을 입은 경찰들은 그녀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계집년이! 감히 우리의 지시에 불응해?"
 "당장 내려!"

 홍화의 치마 밑에서 쭈그려 앉은 자세 때문인지 뭔지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던 장신의 남자는, 경찰들이 소리치는 소리에 더더욱 식은땀이 심하게 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 장신의 남자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지 홍화가 여유롭게 발 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조용!"

 사복을 입은 사람이 단번에 흥분한 제복입은 경찰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미안한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
 "그럼 혹시라도 가시다가 그런 인물이 보이면 연락 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러고는 홍화는 차가운 표정으로 창문을 올리며 말했다.

 "기사님, 출발해주세요."
 
 차가 집을 빠져나가고 경찰들이 쫓겨나듯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궐 같은 집의 대문이 닫혔다.

 경찰들과 거리가 5미터 이상 떨어지자 홍화가 말했다.

 "어디에 내려드리면 되나요?"
 "…학교로 좀 부탁해."
 "학교. 학교에 그리 다니시는 분이 무슨 짓을 했길래 미행까지 당하고 다니는 건가요?"
 "…나도 몰라."
 "돈도 많으신 거 보니 집안도 좋으신 것 같은데 어쩌다 그런건가요?"

 홍화가 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장신의 남자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몰라! 갑자기 날 따라오더라고. 난 그냥 모임 갔었는데."
 "모임요? 무슨 반란 모임이라도 되나요?"
 "아니! 난 그냥 시인들한테 후원해서, 그거 때문에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고 초대 하길래 갔는데 갑자기 따라왔어."
 "충분히 따라 올만 한데요?"
 "그게?"
 "당연하죠. 그나저나 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건가요?"
 "그냥 있는 돈 쓴 거지 뭐."

 그의 대답에 홍화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쭉하며 발을 까딱거렸다.

 "그렇게 있는 돈 막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줄 아시나요?"
 "돈이야 뭐, 많이 있는 사람 많잖아. 하 진짜. 경찰이라니. 돈 쓴다고 경찰 붙은 거면 너무 짜증나는데."
 "뭐 어쩌겠나요? 그나저나, 이제 좀 나오지 않을래요?"

 홍화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발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물론 발의 감촉으로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아, 지금 못 나오시려나?"
 "……."
 "얘기 들어보니 건전하게 노셨다던데. 의외네요."
 "어?"
 "그렇게 돈을 뿌리고 다니셨으면 안 그럴만도 한데."

 홍화가 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아, 아니 저 잠깐만…?"
 "무슨 생각이실까?"
 "아,아니, 그……."
 "걱정마세요. 저는 그런 짓 하고 다니는 기생이 아니니까. 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약속 했거든요."
 "그, 근데 왜…"
 "글쎄요? 어떻게 생각해요?"
 "어,어?"
 "사랑이 변한다고 생각해요?"
 "으응…?"

툭 
 
 홍화가 발로 툭 밀었다.

 "내려요."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충성스런 시동도 와있네요." 

 옥실이 팔짱을 끼고 학교 앞에 서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엉거주춤 그녀의 치맛폭에서 빠져나와 차에서 내렸다.

 "그럼 이만." 

 그러고 그녀는 차문을 닫고는 가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얼빠진 채로 그 자리에 멍 하니 서있었다.

 "…허이구. 좋은 시간 보냈어요?"

 옥실이 그런 장신의 남자를 보며 비꼬며 말했다.

 "미쳤어요? 도대체 정신이 있어요? 사고 진짜 거하게 쳤네요. 경찰들이 문학가들 완전 들쑤셔놨어요. 어떡 할 거에요?"

 옥실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야, 옥실아."
 "왜요."
 "나 어떡하지?"
 "이제야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빨리 돌아가요. 미행까지 붙은 마당에 더 볼 것도 없어요. 가요."
 "나 기생한테 홀린 것 같아."
 "…하."

 옥실이 기가 찬 듯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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