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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고집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고집

SooyangLim 2021. 7. 1. 19:01

 "확실하진 않지만요.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죠."

 옥실이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은 거야?"
 "위해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의심 받고 있으니 조심해야죠."

 옥실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안심하며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럼 됐어."
 "되긴 뭘 됐다는 거에요? 준비 거의 다 됐으니 빨리 떠나요."
 "싫어."

 장신의 남자가 음료를 마시며 말했다.

 "우펜자 더 보고 갈 꺼야."
 "아니…!"
 "기다려."
 "자꾸 이럴거에요!? 가야된다고요!"

 옥실이 화를 냈다.

 "싫다고. 우펜자랑 이제 겨우 좀 친해졌는데 떠난다고? 안 되지, 안 돼."

 장신의 남자가 옥실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한가롭게 음료를 마시며 품 속에 든 종이를 꺼냈다.

 "아참. 내가 시인 후원 해줬다고 문학인들 모임 초대장 받았어. 내일이야."
 "안 돼요."

 옥실은 뭔지 보지고 않고 말했다.
 장신의 남자가 종이를 건네며 투덜거렸다.

 "야, 넌 왜 보지도 않고 말하냐?"

 옥실이 종이를 받아드는 데 마침 밖에 나갔던 기녀 월매가 돌아왔다. 옥실은 급히 종이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날이 따뜻해지다 못해 뜨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워지던 날, 우펜자는 그 날따라 강의가 일찍 끝나서 빨리 마쳤다. 우펜자가 천천히 정리하고 문을 나서는데 이상한 것을 알게 됐다.
 
 '뭐지?'

 우펜자는 강의실 뒤쪽에 앉은 학생들과 앞쪽에 앉은 학생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걸 눈치채고 자세히 보니 그들 사이에는 책상 몇 개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심지어 앞쪽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음에도 뒤쪽에 빽빽하게 모여있었다.

 우펜자는 이 이상한 광경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뒤에 있는 학생들이 농땡이를 피우는 경우라면 납득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우펜자는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왜 굳이 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펜자는 이 이상 현상에 대해서 몇 번 더 강의를 하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어간 강의마다 모두 같은 현상이 있음을 알아챘다.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와 식사하면서 이 사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 꺼냈다.

 "…왜 그럴까요?"
 "무슨 언어 쓰던데요?"

 아즈어로 대화 하던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말을 듣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둘 다 제 모국어가 아니라서……."
 "한 쪽은 구레아어이고 다른 한 쪽은 9구역 언어에요."

 옆에 있던 옥실이 말했다.
 장신의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9구역?"
 "네. 9구역 출신 자녀들이나 9구역과 연관된 정재계 자녀 몇몇이 학교에 다니거든요. 아마 끼리끼리 모여다녀서 그럴거에요." 
 
 옥실의 말은 우펜자의 짐작을 확신시켜줬다.

 "역시……."
 "왜 그러고 있지."
 
 장신의 남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옥실이 핀잔주듯 말했다.

 "왜 그러긴요? 당연히…"
 "아니, 나도 알아. 그냥 좀 그래서. 안 그래요?"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마음이 안 좋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네?"
 "아무 생각 안 들어요?"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떼었다.

 "굳이 그래야 하나 싶죠."
 "그렇죠?"

 장신의 남자가 그런 우펜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다른 생각은 안 들어요?"
 "네? 어… 뭐… 안타깝기도 하고, 굳이 수업시간까지 그렇게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네요."
 "오! 드디어! 어때요? 이제 이해가려나?"
 "네?"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그쪽이 듣고 보는 입장이잖아. 이제 제 기분이 이해 가지 않아요?"
 "네? …아."

 우펜자는 그제야 장신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눈치챘다. 술 먹고 토했던 날을 이야기 하는 것임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우펜자는 그날의 흑역사 때문에 괜히 우물쭈물 했다.

 "아니, 그…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아, 아닌가? 어쨌든 그……."
 "이제 기억하셨네?"

 우펜자의 반응에 장신의 남자가 껄껄 웃으며 우펜자의 어깨를 툭 쳤다. 장신의 남자는 장난으로 놀리고 싶었지만, 더 놀리다간 우펜자가 수치심에 이불킥이라도 할까봐 웃고 말았다. 
 물론 이불킥은 이미 잔뜩 했지만.

 우펜자도 같이 웃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구레아어 한 가지만 가르쳐줄래요?"
 "어떤거요?"



 다음 날, 우펜자는 수업에 들어가서 외워 온 구레아어로 말했다.

 "뒤에 앉은 학생들, 앞 쪽으로 당겨 앉으세요." 

 우펜자의 말에 갑자기 모든 학생들이 움직임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앞 쪽으로 당겨 앉으세요."

 우펜자가 다시 말했다.
 학생들이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우펜자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뒤에 앉은 학생들, 앞 쪽으로 당겨 앉으세요."

 학생들은 쭈뼛쭈뼛 하더니 앞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여전히 앞자리 앉은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자기네들끼리 조금 더 당겨 앉은 정도였다.
 
 "더."

 우펜자가 말했다.

 "더 앞 쪽으로 앉으세요."

 우펜자의 말에 뒤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앞쪽에 있던 학생들의 눈치를 계속 봤다.
 그러다 한 학생이 책을 꽉 쥐더니, 가측에 비어 있던 제일 앞자리로 왔다.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뒤쪽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잠깐 주춤하는 듯 하더니, 이내 우르르 앞으로 나와서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앞쪽으로 붙어서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자 우펜자가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앉으세요." 



 "가지 말라니까 꼭 그렇게……."
 "아 가짜 이름 남길게. 됐냐? 잔소리 좀 그만해."
  
 시인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옥실이 계속 잔소리를 하자 장신의 남자가 넌덜머리 난다는듯 말했다.

 "아참. 너 연락은 되냐?"
 "네? 무슨 연락요?"
 "전에 범백한테 약속한 거." 
 "아, 그거……."
 "지금까지 연락 없을리가 없는 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말에 장신의 남자가 대뜸 말했다.

 "그 쪽 돈 필요하지 않나?"
 "뭐, 그렇겠죠? 제가 알아서 부칠게요."
 "네가 알아서 한다는 건 전부 맘에 안들어."
 "예?"
 "지금 가서 부치고 와."

 그 말을 하며 장신의 남자가 액수가 적힌 종이 쪽지를 건넸다.
 옥실이 종이에 적힌 액수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미쳤어요?"
 "안 미쳤는데. 대충 넘기려 한 네가 미친 거지."
 "하……."

 옥실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얼른 가 봐. 난 모임 다녀올테니."
 "하……."

 장신의 남자는 옥실을 보내고 모임에 갔다.


 "다음 주에도 와 주시겠습니까?"
 "다음 주? 그러지 뭐."

 모임의 말미에 장신의 남자는 또 초대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와서도 후원금을 줬다. 주체자의 요청에 장신의 남자는 별 생각 없이 승낙 해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모임이 끝나고 나오는데 날이 굉장히 흐렸다. 

 "어? 비 오겠네."

 어느새 모임 장소에 와서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옥실이 말했다. 

 "30분 내로 강수확률 97%이상이에요."
 "그냥 비온다고 하지 그러냐?"
 "작은 확률도 무시하면 안되거든요?"
 "알았다, 알았어. 야, 우산 사러가자."
 "우산요?"
 "비 온다며."



 학생들을 앞에 앉게 한 첫 수업이 끝 날 때가 됐을 무렵, 우펜자는 비 내리는 소리에 창밖을 바라봤다.

 "이런."

 우펜자는 우산을 안 갖고 왔기에 기숙사까지 뛰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섰다.
 
 "우산 없죠?"
 "어?"

 장신의 남자가 우산을 들고 강의실 문 옆에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근처에 모임있어서 나왔다가 비 오길래 들렀어요. 가죠?"

 그 말을 하며 장신의 남자가 우산을 들고 있는 옥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옥실은 가만히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옥실을 쳐다봤다.

 "뭐해?"
 "이건 제껀데요."
 "뭐?"
 "그러게 왜 2개 샀어요?"
 "아 맞네? 3개 사야 되네?"

 장신의 남자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같이 쓰고 갑시다. 숙소 가는 거죠?"
 "앗? 전 괜찮은데……."
 "우산 큰 거 사서 다행이네."

 장신의 남자가 그 말을 하며 우산을 폈다.
 우펜자가 사양하다가 결국 우산을 쓰고 걸었다.

 "그때 가르쳐 주신 거 써봤어요."
 "배운 거?"
 "구레아어요. '앞 쪽으로 당겨 앉으세요!' 이거요."
 "아아 그거. 어땠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이 망설이더니 몇 번 얘기 하니까 다 앞으로 왔어요."
 "오."
 "앞으로도 그렇게 앉으라고 했어요."
 "그래요? 잘 됐네. 잘 했어요."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에게 칭찬을 건넸다.

 "네? 아,아니 제가 뭘……."
 "잘 한 건 잘 한거지. 연습도 많이 했잖아요?"
 "아 그……."
 "발음도 연습 많이 했네. 확 좋아졌잖아요."
 "하하……. 고마워요."
 
 우펜자가 장신의 남자의 칭찬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이쪽이죠?"
 "네? 네. 어? 근데 어떻게 숙소 위치 아세요?"
 "어떻게 아냐니?"

 장신의 남자가 이상한 질문을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업고 왔는데 모를리가?"
 "아."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가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또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이, 뭐 됐어."

 우펜자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럼 들어가 쉬어요."
 "네… 앗?"

 우펜자는 그의 어깨 한 쪽이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

 "아니, 옷이… 어깨가……."
 "네? 아. 바람 때문이야, 바람. 그럼 난 가요."

 장신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손 흔들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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