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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이유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이유

SooyangLim 2021. 7. 8. 19:01

 옥실이 한숨은 장신의 남자에게 여전히 씨알도 안 먹혔다. 하지만 미행을 당한 것은 뭔가 자극제가 되었는지, 후원이라거나 남다른 식당과 술집을 간다거나 사람을 막 만나고 다니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신에, 수상하지 않은 시간대에 수상하지 않은 곳(학교나 전화가, 시장 같은 곳)을 싸돌아다니는 일은 꽤나 잦아졌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또 문제였다.
 왜냐하면 장신의 남자는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차이는 날 지라도, 마타마이니 행성 어딜가도 어느정도는 먹힐 외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외양 때문에 기억에 각인되기도 쉬운데 마구 돌아다니니 옥실은 열 나서 앓아 누울 것 같았다. 

 게다가 우펜자를 만난답시고 학교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니 학생들도 점점 장신의 남자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우펜자가 그렇게 말하고 수업을 마치고 정리하는데 교실 한 구석이 웅성웅성했다. 

 '뭐지?'
 
 우펜자가 웅성거리는 곳을 흘끗 봤다가 다시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그때 한 학생이 다가와 우펜자의 모국어인 어눌한 아즈어로 말했다.
 
 "오늘 또 친구분 왔어요."
 "친구?"  

 학생들이 강의실 문쪽에 학생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곳을 바라봤다. 문 밖에 누군가 와있는듯 했다.
 학생이 다시 외워온 듯한 어눌한 아즈어로 물었다.

 "선생님 친구분 여자친구 있어요?"
 "응? 무슨 말?"

 우펜자도 여기 살면서 구레아어를 익혔기에 어눌한 구레아어로 물었다.
 학생은 또 아즈어로 우펜자를 재촉하며 물었다.
 
 "빨리요, 선생님. 친구분 애인 있는지 물어봐 주시면 안 되나요?"
 "무슨 말? 누구?"

 여전히 우펜자는 누구를 보고 하는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구레아어로 말했다.
 우펜자가 학생들의 재촉에 남은 짐을 급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거의 떠밀리다시피 웅성거리는 곳으로 향했다.

 "오! 이제 나왔네!"

 장신의 남자가 많은 학생들에게 둘러쌓여 질문을 받으며 어색하게 굳어있다가, 우펜자가 다가오자 환하게 웃었다. 장신의 남자가 웃자 학생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웅성웅성 말 하는 소리가 우펜자 귀에 들렸다.

 "선생님 오시니까 웃네."
 "웃는거봐. 진짜 잘생겼어."
 "선생님 드리려고 사왔데요."
 "정말 다정하다. 애인 있을까?"
 "선생님한테 애인보다 더 잘해주는 것 같아. 애인한테는 얼마나 잘 해줄까?"
 "선생님, 저 사람 애인 있데요?"
 
 장신의 남자가 달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간식을 담아온 봉지를 들고 다가오며 아즈어로 말했다.

 "시장에서 맛있는거 있길래 생각나서 사왔는데……. 어쩐지 학생들이 자꾸 나한테 오더라고……."
 "아. 고마워요."
  
 우펜자는 마침 배고픈 참이라 간식을 받아들었다.
 어눌한 아즈어로 애인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보채던 학생이 또 아즈어로 크게 말했다.

 "저분이 애인보다 낫다. 선생님의 친구분 애인 있어요? 선생님, 친구분 나랑 사귀자고 해 줘."
 "어, 어?"

 우펜자가 장신의 남자가 있는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자 당황해서 얼어버렸다.
 장신의 남자는 그녀의 고백에 웃음이 터졌다.
 학생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잘 해준다. 나랑 사귀자. 나랑 밥 먹자. 선생님, 친구한테 나랑 사귀자고 해 줘."
 "하하하. 싫어. 너네 선생님하고 밥이나 먹으러 갈 거야. 야 너, 선생님한테 곤란하게 하지마."

 장신의 남자가 웃으며 아즈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얼어있는 우펜자의 어깨를 툭 치며 웃음기 있는 눈으로 우펜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번에 학생에게는 구레아어로 말했다.

 "너 아까 내가 구레아어로 말 하는 거 봤으면서 왜 아즈어로 말해? 그리고 선생님 곤란하게 하지 말고."
 "네?"
 "이 사람한테 내가 애인있는지 물었잖아. 게다가 왜 선생님한테 고백 시켜? 구레아어 안 익숙한 사람한테, 그것도 그런 질문 하면 곤란하지."
 "아 알겠어요. 9구역 공용어로 말해줄까요? 아님 구레아어? 애인 있어요? 나랑 밥 먹으러 가요!"

 학생은 장신의 남자가 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대포로 물었다.

 "싫어. 너네 선생님하고 밥 먹을 건데."
 "같이 먹으러 가요!"
 "싫어. 너, 선생님 또 곤란하게 할 거 잖아."
 "선생님한테 얘기 해달라고 안 하면 나랑 만나 줄거에요?"
 "협박이 수준급이다?"
 "협박 아닌데요?"
 "난 말야, 이 사람 괴롭히는 사람하고는 상종하기 싫거든?"

 장신의 남자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게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는 우펜자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남 곤란하게 하는 사람은 더 싫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옥실이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끼었다.

 "아, 이건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어쨌든 싫어."

 장신의 남자의 거절에 학생의 표정이 화가 난 듯 울그락 붉그락 하게 변했다.
 그러고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에게 아즈어로 말했다.

 "학생이 방금 또 고백했어요. 밥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네?"
 "같이 가기로 했어요?"
 "당신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랑 내가 왜?"
 "네?"
 "뭐 먹을래요? 아, 그 과자는 나중에 간식으로 먹죠. 밥부터 먹고." 
 "아, 네? 네……."
 
 우펜자는 얼떨떨하게 장신의 남자에게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우펜자는 분해서 씩씩거리고 있는 학생을 뒤로 힐끗힐끗 쳐다보며 밖으로 나갔다.

 "뭐라고 한 거에요? 화난 것 같은데……."
 "신경쓰지 마요. 그 쪽한테 해 될 일은 없게 해놨으니까."
 "으음……."
 "고백 받은 건 나지 그 쪽이 아니잖아? 신경쓰지 마요."
 "거절한거죠?"
 "네."

 그 말에 순간 우펜자는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이네요."
 "…괜히 사이에 끼여갖고. 이제 괜찮을겁니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한테 순간 안쓰러운 눈빛으로 봤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펜자는 사이에 끼였다는 말에 그제서야 깨달은 듯 말했다.

 "아. 맞네. 그랬네요."
 "네?"

 우펜자의 말에 장신의 남자가 휙 돌아보며 말했다.
 장신의 남자의 반응에 순간 우펜자는 '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어?' 하는 표정이었을까?

 장신의 남자가 또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또 중간에 끼였는데 자기가 다 덮어쓸려고 그랬던 거에요? 혼자 고통 받고?"
 "아,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우펜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

 '…어? 뭐지?'

 우펜자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장신의 남자가 물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요?"
 "어? 글쎄요?"
 "에이. 그런 거 맞네. 내가 말하니까 또 아닌 척."

 '아니, 진짜 그건 아닌데. 어? 뭐지?'

 우펜자가 잠시 멍해졌다.

 "어휴. 아까 그렇게 말하길 잘했지.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아, 네네……."
 
 우펜자는 얼떨떨하게 말하며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 속에 의문이 남아있었다.

 '뭐지?'
   
 그리고 식당에 가서 앉자 장신의 남자가 말했다.

 "좀 있으면 시험이지 않아요?"
 "아, 네 맞아요."
 "시험 문제는 냈어요?"
 "아직이요. 아직은 시간이 좀 있으니까……."
 "바빠지겠네."
 "아마도요."

 우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신의 남자가 자리에 앉아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얼굴 보기 힘들어지겠네."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기간 좀 있으니까 조절 할 수 있어요."
 
 우펜자가 다급히 아니라는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학사 일정을 뻔히 알고 있는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가 무리해서라도 시간 낼까봐 말했다.

 "에이, 바쁜 거 아는데. 괜히 무리하지 마요. 바쁘니까 자주 오지는 않을게. 오늘 같은 일도 있었고. 식사 하자고 맨날 불러내기 미안하네."
 "아니, 진짜 괜찮아요. 자주 보는 게 좋아요."
 "그래요?"
 "네. 자주 뵙는 게 좋아요."
 "으잉? 그래? 나 안 귀찮아요?"
 "같이 대화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재밌어요. 말도 잘 통하고."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말에 씩 미소 지었다.
 순간 우펜자는 또 뭔가 마음이 놓인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 뭐지?'

 장신의 남자가 미소 짓다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 같은 일 또 있으면 당신 곤란하니 그냥 잠깐잠깐 보고 갈게요. 하는 일 집중해야되니까. 이렇게 방해되면 곤란하잖아."
 "아니, 괜찮은데……."
 "또 괜찮데, 또."
 
 장신의 남자가 수저로 우펜자를 찌를 것 처럼 장난치며 말했다.
 장난치던 그가 갑자기 생각난듯 말했다.

 "아 근데, 아까 그 학생은 진짜 당돌하던데. 와, 난 지금은 좀 보수적이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안 그래요?"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원래 그래요?"
 "네?"
 "학생들요. 저 학생이 특이한 것 같은데. 아닌가? 원래 저래요?"
 "그, 글쎄요?"
 "와, 진짜 시대불문 장소불문 특이한 사람은 그냥 특이해."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 날 밤, 우펜자는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자리에 눕는데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진짜 좋은 사람이야.'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곤란해질 걸 알고 그렇게 나서주다니. 뭔가 마음이 놓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응? 왜?" 

 우펜자가 갑자기 눈을 깜박였다.

 "왜? 왜 마음이 놓이지?"

 곰곰히 머릿 속으로 그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날 지지해줘서?'

 하지만 속으로는 그게 답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한 것 처럼 곤란한 일을 막아줘서?'

 우펜자가 눈을 감고 가만히 다시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반짝 떴다. 컴컴한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게 순간 그가 아까 미소 지었을 때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어서 잠에 들려는 듯 눈을 감았다.

 "응?"

 아까 학생들이 꺅꺅거리며 장신의 남자 근처에 모여 있던 장면이 생각났다.

 '…잘생기긴 했지.'

 장신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름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봤다.

 '학생들이 좋아 할만 해. 그런거 보면 외모 보는 눈은 어딜가든 비슷한가봐. 어휴, 부럽다. 나도 좀 잘 생겼으면 좋겠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똑똑하고 돈도 많고 성격도 좋고. 부럽네. 멋지다, 진짜.'

 우펜자는 괜히 질투한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뜨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장신의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생기면 인기 많아서 애인 금방 만들겠지.' 

 우펜자는 몇 년 전에 헤어진 전 여친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난 깨진지도 한참 됐네.'

 우펜자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생각했다.

 '난 연애를 언제 하나. 학위 따고 나서 누구든 만날까 했는데 여기 와 있으니…….'
 
 우펜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근데 만날 수는 있으려나? 괜찮은 사람 있으면 좋은데.'

 그 때 다시 장신의 남자가 아까 미소짓고 있던 게 떠올랐다.
 우펜자는 어쩐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우펜자는 뭔가 아리송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딱 그 사람 같은 여자 있으면 좋은데. 성격 좋고, 잘 챙겨주고, 똑똑하고."

 그러고는 옆으로 돌아 누워 잠을 청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날은 따뜻함을 넘어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계절의 변화는 학생들에게는 시험과 방학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렇게 더워진 날씨는 시원한 아즈국과는 달리 더위에 약한 우펜자의 체력을 빠르게 고갈시켰다.

 "여기요."
 "매번 고마워요."

 우펜자가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장신의 남자가 건넨 얼음이 가득한 음료를 받아들었다. 우펜자가 더위를 많이 타는 걸 알고, 장신의 남자는 그에게 시원한 음료를 자주 사다줬다.
 우펜자가 얼음이 가득한 음료를 볼에 대고 있다가 장신의 남자에게 물었다.
 
 "저녁에 한 잔 하러 갈래요?"
 "또? 곧 시험 기간이라 바쁘잖아요?"
 
 날이 더워지니 우펜자는 시원한 것이 있는 곳을 자주 찾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장신의 남자와 시원한 저녁 시간에 차가운 술을 한 잔 하려고 자주 만나게 됐다.

 "그렇긴한데, 덥잖아요. 시원하게 한 잔 하고 자면 잠이 잘 와요."
 "…요즘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 드는 지 알아요?"
 "네?"
 "시원한 데 살던 이가 더운 데 오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네."
 "하하……."

 우펜자가 더위에 지쳐 기운 없이 웃었다.
 장신의 남자가 멍 하게 음료수를 볼에 대고 있는 우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열사병 안 걸린게 천만다행이네."
 "곧 걸릴 지도 몰라요."
 "그럼 안되는데."

 우펜자는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 요즘 그쪽 보면 어떤 생각 드는 지 알아요?"
 "응?"
 "그 걸치고 있는 옷 안 더울까 생각해요."
 "저녁에는 기온 떨어지니까 입어야 돼, 나는."
 "그 때가 딱 적당하지 않아요?"
 "안에 옷이 얇은 거라 밤에는 추워. 그쪽이랑 달라."
 "하기야. 다들 그렇게 보이긴 하더라고요. 난 다른 나라 출신이라 더위 많이 타고."

 우펜자가 다시 수업 들어 가야 될 시간이 되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신의 남자가 비틀거리는 우펜자를 잡아주며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수업하다 쓰러질라."
 "에이. 그렇지는 않아요."
 
 우펜자는 비틀거리며 수업을 하러 들어갔다.

 우펜자가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장신의 남자와 옥실이 시원한 음료와 얼음 주머니를 한가득 안고 서있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
 "오늘은 마시러 가지 말고 이거 마시고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술 자꾸 마시면 더 힘들어지니까. 이러다 내가 술 중독자로 만들 것 같아."

 걱정스런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안 그래요."
 "안 그러긴. 이번 주에 벌 써 몇 번이야. 그냥 쉬세요."

 그렇게 말하며 장신의 남자와 같이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우펜자가 거들려고 하며 말했다.

 "아, 제가 들고가면 되는데. 더운데 무겁잖아요. 같이 들어요." 
 "힘도 없는데 뭘 들려고. 음료수나 마시면서 와요. 어차피 난 이거 들고 있으면 시원해서 괜찮으니까." 
 "진짜 감사해요."
 
 우펜자가 음료수를 쭉 빨아먹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오늘 진짜 푹 자요."
 "그럴게요."
 
 우펜자는 무거운 얼음 주머니들과 음료수를 가득 안고 가는 장신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진짜 좋은 분인 것 같아요."
 "누구? 나요?"
 "네."
 "음료수 사줘서?"

 장신의 남자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음료수 사줬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누가 사탕 사주면 아무나 막 따라가겠네."  
 "하하."
  
 장신의 남자와 옥실이 우펜자의 방에 가득 안고 있던 얼음과 차가운 음료수들을 와르르 쏟아놨다.
 그러고는 얼음을 안고 있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으아! 엄청 차갑네! 저 지금 완전 얼음이랑 같은 온도 된 것 같은데. 여기 손 대봐요."
 "와 진짜네. 손도 차가우신데요?"
 "저 음료수도 엄청 차갑거든요. 얍!"

 장신의 남자는 장난으로 차가운 손을 우펜자 목 쪽에 확 갖다댔다.

 "앗, 차거!"
 "냉동 괴물~ 얼음 괴물~"
 "으앗!"

 장신의 남자가 요리조리 피하는 우펜자한테 계속 장난쳤다. 그러고는 아직 엄청 차가운 몸으로 확 끌어안았다.

 "신기술! 얼음 가두기!"
 "으악! 차가!"  
  
 아무리 찬 지역에서 온 우펜자라도 방금 전까지 얼음을 잔뜩 안고 있던 사람한테 잡히니 온 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어?'

 우펜자가 장신의 남자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확 뿌리쳤다.

 "진짜 차갑죠? 와 소름 돋았네!"

 장신의 남자는 별 생각 없이 소름이 돋아있는 우펜자를 보며 깔깔 웃었다.
 우펜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팔을 보며 소름이 돋은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너무 차가워서인지 뭔지 동시에 열이 확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만 가죠?"

 옆에서 잠자코 있던 옥실이 말했다.

 "정리는 해주고 가야지. 이렇게 쏟아놓고 가면 어떡하냐?"
 "아, 아뇨. 더운데 시원해지게 제가 천천히 정리할게요."
 "아, 그렇게 할래요? 더워보이긴 하시네."
 
 우펜자가 그 말에 순간 놀라 얼굴에 손을 댔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러게요. 더위 먹었나봐요."
 "큰일이네. 얼굴이 빨간데. 옥실아, 괜찮을까?"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이마에 차가운 손을 대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우펜자는 확실히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인지했다. 도저히 생각으로는 제어가 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옥실이 말했다.

 "이럴 땐 쉬어야 되요. 그렇죠?"
 "그, 그래요. 쉬면 괜찮아질거에요."
 
 우펜자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말에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뜨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푹 쉬어요. 잘 자요~"
 
 장신의 남자가 가고 나자 우펜자는 얼음 주머니와 음료수들 옆에 힘 빠진 것처럼 천천히 스르륵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차가운 음료수를 2개나 연달아 마시더니 중얼거렸다.

 "…더워 먹은 거 맞…지…?"



 그 사이 날은 더 더워지고 학기의 마지막 시험이 찾아왔다.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의 답안을 채점까지 끝나자, 마침내 학기가 끝나고 우펜자의 방학도 찾아왔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와의 약속 장소에 가며 옥실에게 물었다.

 "이맘 때 아냐?"
 "네."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들고 있던 부채를 부치다가 탁 소리나게 접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채점 하다가 결심이 섰나?"
 "모르죠."

 시험 기간과 채점 기간 동안 바빠서 못 보던 우펜자와 장신의 남자는 한참만에야 만났다. 
 우펜자는 약속 장소로 가면서 반가움도 있었지만, 생각이 매우 복잡했다.

 '오랜만이라서 그래. 반갑잖아. 학기도 끝났잖아. 즐거워서 그래. 맞잖아? 맞다고.'

 우펜자는 자신의 의식과 생각으로 무의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꾹꾹 억눌렀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고 호응하듯 시원한 저녁 공기를 맞으며 걷다보니 진정 되기 시작했다. 우펜자는 이제 좀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이 좀 더 자신감 있어졌다.

 약속 장소 근처에 가니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그의 형상을 알아보자마자 지금까지 억누르던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쿵 쿵 쿵 쿵

 몸의 모든 기능이 자신의 뇌의 통제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우펜자는 걸음을 멈춰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제 할 일 다 끝났죠? 방학 맞죠?"
 "네? 네……."
 "더위 먹었어요? 또 상태 안 좋네. 하긴, 오늘 덥긴 했지."
 "네? 네. 덥더라고요."
 "그럼 시원하게 한 잔하러 갑시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한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의 어깨동무에 우펜자는 너무 걱정되서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무엇이 걱정되느냐면 자신한테 닿은 그의 팔을 통해 자신의 귀까지 차오른 심장소리를 들킬까봐, 그게 걱정되었다. 

 장신의 남자는 자리에 앉아 음식과 술을 시키고는 물었다.

 "시험 기간동안 어땠어요?" 
 "시험 기간에요?"
 "네. 뭐 이상한 거 없었어요?"
 "아, 있었어요! 9구역 출신 경찰들이 뒤에 있었는데 한 학생이……."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의 물음에 이상한 일이 생각나서 퍼뜩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 하다보니 우펜자는 점점 진정이 됐다. 하지만 이 묘하게 들뜬듯 취한 듯 몽롱한 이 이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즐거운 술자리가 길어지고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시원한 밤공기가 살랑살랑 불어오니 기분이 점점 더 몽롱하게 좋아졌다. 거기다 술 때문에 몽롱한 기분이 배로 증폭됐다. 술을 마시다보니 더워져서 상기되는 느낌도 있었다. 
 
 술 때문에 잔뜩 상기된 건 장신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검고 얇은 가디건 같은 외투, 그 안에 입고 있는 속이 비치는 더 얇은 하얀 셔츠. 더워서 몇 개 풀어버린 단추와 속이 비치는 옷 뒤로 피부가 가슴팍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펜자는 그 상태로 시종일관 웃음기 있는 얼굴로 바라보며 대화하는 장신의 남자를 보고 있다보니, 이제는 심장이 귀 옆에 붙은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네?"
 "얼굴 완전 빨간데? 오늘은 술 천천히 마셨는데… 또 토하는 거 아니죠?"

 장신의 남자가 혹시 열나나 싶어서 우펜자의 이마를 짚어보며 말했다. 우펜자가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 쪽도 빨개요."
 "아, 맞아. 나 술먹으면 빨개지더라고요?"
 "그래요? 해독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뭐 어쨌든, 너무 많이 마시진 마요. 오늘은 토하면 안 돼. 지금은 나도 좀 취했으니까."
 "아, 나 물어볼 거 있어요."
 "어떤 거?"
 "전에 토했을 때 어떻게 데려왔어요?"
 
 우펜자가 갑자기 토한 날 이야기를 물었다.

 "어떻게는. 업고 갔다니까. 가다가 내 뒷통수랑 코트에 토했어요."
 "하하. 미안해요."
 "아이, 됐어, 됐어. 지난 일인데요, 뭘."
 "혹시 그럼 옷은…?"

 장신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흐흫. 그게 궁금했죠?"
 "하하. 고마워요."
 "에이. 뭘."

 장신의 남자가 큭큭 거리면서 술잔에 남은 술을 털어 마셨다.

 "근데 진짜,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실까?"
 "말했죠? 내 맘이라고."
 "고맙다는 말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또 뭐 미안하네 어쩌네 그런 생각하지마요. 내 맘이야."

 장신의 남자가 서로의 술전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우펜자가 술을 쭉 들이키고는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뇌의 필터를 안거치고 말이 나왔다.

 "술 취해서 그러나? 되게 잘생겨 보이시네." 
 "아, 그건 술 취해서 그런 거 아닌데. 잘생긴 거 맞아요."
 "하하."
 "어? 비웃어요? 나 진짜 멋진데?"
 "비웃는거 아니에요.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잘 생겼다 하니까 웃겨서 그래요."
 "내가 내 얼굴 잘 생긴 거 아는데 뭐 어때서? 이 얼굴에 이 정도로 말하는 거면 겸손한 편이지. 난 사실만 말 했어요."
 "하하하."

 우펜자가 웃었다.  
 장신의 남자가 술을 마시고는 말했다.

 "오늘 많이 웃어서 좋네. 학기 끝나니까 좋죠?"
 "그렇네요. 벌써 한 학기가 끝났네요. 항상 웃겨줘서 고마워요." 
 "재밌다 해주니 나야말로 고맙지, 뭘."
 "잘 생겼다하니 하는 말이지만, 인기 많겠네요."
 "인기? 하하. 인기라……."

 장신의 남자가 의미심장하면서도 씁쓸하게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시다가 갑자기 떠오른 듯 말했다.

 "아, 그때 학생이 고백한 거 땜에 그러죠?"
 "그때 고백 안 받던데. 애인 있어요?"
 "애인?"

 장신의 남자가 큭큭거렸다.

 "우펜자씨한테 맨날 놀러 오는거 보면 모르겠어요? 없지."
 "하하."
 "그쪽은 없어요?"
 "여자친구요? 지금은 없어요."
 "어, 뭐야. 지금은?"
 "헤어진지 몇 년 됐어요."

 우펜자가 술병에 남은 마지막 술을 자신의 술잔에 따르며 말했다.

 "오래됐죠. 이제 기억도 잘 안 나요. 학기가 끝나는 것처럼 사랑도 끝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또 다음 학기가 찾아오는 것 처럼 찾아오고."
 "흐음."
 "그거 알아요?"
 "네?"
 "그쪽 되게 괜찮은 사람이에요."
 "제가 좀 괜찮죠."
 "사람 대 사람으로서요."
 "크으. 인정 받았네. 고~맙습니다. 난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장신의 남자가 감동받아 우는 척 장난치며 말했다.

 "힘들 때 마다 도와 주시고, 저를 괜찮은 사람이 되게 당신이 만들어줬어요. 자신감도 채워주고. 그래서 제가 당신 되게 좋아해요."
 "아, 나도요. 나도 좋아. 하하. 완전 존경해요."
 "성별을 떠나서요."

 그 말을 하고 우펜자가 술을 쭉 들이켰다.
 여기까지 듣고도 장신의 남자는 그냥 미소를 띄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쪽이랑 있으면요, 그냥 여기 계속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

 그 말에 장신의 남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 떠날까 생각 중이에요. 떠나기가 싫어요."
 "네…?"
 "제가 당신 사랑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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