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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Quite! 2부 18화 본문

소설(Novel)/D.Q.D.(캣츠비안나이트 외전)

Quiet? Quite! 2부 18화

SooyangLim 2023. 12. 4. 19:01

 주현은 마치 돌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서 인터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띵동-

 주현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이 집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왜 온 건지, 문을 열어도 되는지 등등 오만 생각들이 교차했다. 집에 없는 척 계속 가만히 있어야 되는지, 아니면 쫓아내야 되는지 고민했다.

띵동-

 주현은 고민하면서도 천천히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나 손이 문고리를 향해 망설임으로 멈칫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결국 열어주지는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등지고 아예 돌아섰다.

띵동-

 일곱번쨰 벨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벨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해 달라고 한 거 문 앞에 놔두고 갈게. 그럼… 음… 잘 있어. 그리고… 미안해."

 문 너머로 미경의 목소리가 타고 넘어와 주현의 귀에 꽂혔다.




벌컥

 "뭐가 미안한데요?"

 갑자기 문이 열리자마자 주현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미경은 문 앞에서 문이 열려서 잠깐 놀란 표정이었으나,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미경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바뀐 표정으로 주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현은 그 침묵과 표정 뒤의 미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 뒤에 주현은 화 난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

 "포교라도 하러 왔어요? 남의 신상까지 캐서?"
 
 그 말에, 주현이 느끼기에는, 미경이 마치 주현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

 "설마."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놨던 꾸러미들을 들며 말했다.

 "왜 있으면서 문 안 열어줬어? 비켜 봐. 이거 냉장고에 넣어놓게."

 미경은 거침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주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떨떨해 하며,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들이닥친 미경을 문간에서 가만히 바라봤다.

 "너 여기 안 사니? 아니, 뭐 아무 것도 없어?"

 주현이 집 대문을 닫기 무섭게 미경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미경은 갖고 온 꾸러미를 끌러서 냉장고에 뭔가를 잔뜩 채워 넣었다.



 "뭔데요?"

 주현이 아줌마 모드가 된 미경에게 다가가서 팔을 잡아 멈추고는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건데요?"
 "먹을 거 없대서 넣어주는 건데."
 "누가요?"
 "그걸 맨 먼저 물었어야지. 누가 여길 알려줬냐고."

 미경이 혼내듯 말했다.
 주현은 그 말에 눈이 커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미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아니 지금 무슨…"
 "뭐, 어차피 험한 놈들은 물어도 얘기 안 해주니 상관없긴 하지. 자기 목적 줄줄 부는 거는 현실에는 잘 없으니까 알아 둬. 물론 잘 알고 있겠지만 말야."
 "……."
 "아. 애초에 문 열어주면 안 돼. 조심 좀 하라고. 너 유명인이잖아." 

 미경이 훈계하듯 중얼중얼 얘기하자 주현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 나 참……."
 "작정하고 접근하는 놈을 조심하란 거지. 난 너네 회사 사람 때문에 알게 됐지만."
 "회사 사람?"
 "그래." 
 "회사 사람… 회사 사람 누구요?"
 "누구겠어?"

 라고 미경이 말했지만, 주현은 짐작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때 미경이 주현이 잡을 팔을 쳐다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주현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김주현씨, 당신이랑 힘 겨루기 하는 바보짓 할 생각 없으니까 그만 놓으십시오. 보통 사람은 당신 손에 신체가 훼손되기 쉽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익숙한 듯이 하는 딱딱하고 공무적인 존댓말에 주현은 놀라서 손을 뗐다.
 어느새 미경의 육안으로 보기에도 손목이 심각할 정도로 멍들어 있었다. 주현과 힘겨루기가 바보짓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 시점에서 주현은 이 말의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걸 깨닫고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주현이 더듬거리며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
 "됐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미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하며 말했다.

 "일단 잠깐 앉아있어. 이거 냉장고에 빨리 안 넣으면 금방 상해."
 "……."
 "아니, 너 근데 환기 안 했니? 집에 이상한 냄새나는데?"
 "……."
 "세~상에. 여기서 나는 냄새구나! 얼른 빨래부터 해야겠다."
 "……."
 
 주현은 우두커니 서서 미경을 바라봤다. 자신의 집을 제 집 마냥 다니며 자신의 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동분서주하는 아줌마 같은 미경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누가 여길 알려준 건지부터 해서, 무슨 목적인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자꾸만 화도 치밀어 올랐다. 주현은 여러 생각들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생각을 안 하고 싶지만 자꾸만…

 '왜 이렇게 반갑고 편한지 모르겠…'

 "하아."

 주현은 튀어나오려는 생각을 한숨으로 막고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가져 온 것을 정리를 하며 미경은 그런 주현을 흘끗 바라보고는, 주현이 눈치 못 채게 한숨을 쉬었다. 미경은 주현이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 갈아 입어. 혼란스러운 표정 그만 짓고."

 소파에 앉아 있는 주현에게 다가와 미경이 들고 온 꾸러미 중에 하나인 쇼핑백을 내밀며 말했다. 그 안에는 갈아입을 옷과, 예전에 샤인데이에게 받았던 뾰족하고 날카로운 장식이 있었다.

 주현은 샤인데이에게 받은 장식이 있는 걸 보고는 최소한, 회사 내에서도 자신과 꽤 가까운 사람이 미경과 내통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이라는 미경의 말에, 주현은 자신의 생각을 들켰다고 생각해서인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여기 있는 동안 편하게 생활하게 팬들이 모르는 옷 사서 갖다주라고 하더라."   
 "……."

 주현은 그렇게 말 하는 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얌전히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다시 거실로 나오니 미경이 주현이 앉았던 ㄱ자 모양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머그잔 2개가 놓여있었다.

 "누가 보낸 거에요?"

 주현이 소파 쪽으로 오며 미경에게 물었다.
 하지만 미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주현은 소파에 앉아 미경을 보며 계속 물었다.

 "매니저? 사장님? 아님 멤버? 전 김두원 박사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혹시… 애들?"

 가만히 듣고 있던 미경이 주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말한 사람들 전부 다 못 믿는구나."

 속마음을 들킨 주현은 동요하는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며 눈싸움하듯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물었다. 

 "…찾아온 이유가 뭔데요?"
 "네 속얘기 너무 많이 하지 마. 약점 된다."
 "……."
 "지금은 그 속얘기 들어주러 왔고."
 "방금 약점 된다면서요?"

 주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미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경은 머그잔을 들어 안에 든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책임지러 온 거야. 네 속이 썩어가는 이유 중에 내 탓도 있으니까."
 "하!"

 주현이 비웃었다.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는데요?"
 "네가 네 일 하는 것처럼 나도 내 일을 하는 것 뿐이야. 그게 내 책임이고."
 
 그 말에 주현은 아무 말 없이 미경을 바라봤다. 다른 말보다 '일'이라는 말이 가장 걸렸다. 주현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일꺼리인가 보네요."
 "맞아.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일."

 미경의 대답에 주현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주현이 갑자기 화내는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네?"
 "단 한 번도 내 예상이나 추측에 가까운 대답을 하질 않잖아요! 한 번도!"
 "그래서 맘에 들었던 거야?"

 미경은 놀리는 듯, 장난치는듯 살짝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은 그런 느낌 보다는, 또 튀어나온 예상 밖의 대답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서 미경 쪽을 입을 딱 벌리고 바라 볼 뿐이었다. 
 미경은 머그잔을 내려놓고는 주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공적인 일이라는 말보다 사적인 일이라는 말이 더 너한테 꽂히고, 단지 일이라는 말이 신경 쓰이고, 눈 앞의 상황보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더 참을 수 없었고?"
 "…사람 속 긁어놓는 건 정말…"
 "그래서 온 거야. 난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고, 네가 세상에 토로할 수 없는 부분만 갖고 사라질 거니까. 전에도 네가 안 믿었지만, 난 사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고…"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가 누구 좋으라고 내 속 얘기 말 할 거라고 생각해요?"

 주현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미경의 말을 잘랐다.
 그 말에 미경이 피식 웃으며 주현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왜? 자기 비밀은 말 안 해주면서 내 비밀은 다 아니까 서운해?"
 "와 정말……."

 주현이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팔짱을 풀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마냥 두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탁 때렸다. 그리고는 머그컵의 음료를 마셨다.

 "휴대폰 너무 보지마."

 미경이 대뜸 말했다.
 주현은 음료를 마시다가 멈추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경을 봤다.
 미경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인터넷 말하는 거야. 안 좋은 거 자꾸 보면 힘들어지니까. 그럴수록 더 외로워질꺼고, 공허해질 거야. 세상 일에 관심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매달릴 필요도 없어. 사실 따지고 보면 인터넷만 그런 것도 아냐. 알잖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어도 외롭고, 돌아서면 적 같이 느껴지게 되고."
 "…이제 내가 뭘 보는 지도 아나 보죠?"
 "그때 사이비 얘기 듣고 있었잖아."
 
 미경의 말에 주현이 컵을 내려놓고는 헛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포교하러 온 거 맞네."
 "반대야."
 "?"
 "네 입장상 사람들과 얘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나만 그런가? 누구하고 얘기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 털어놓고 싶다, 답을 찾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
 "근데, 다 그래. 다들 각자 사정이 있어서 말 못하고 살아. 운이 좋아서 대화할 상대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얘기 못해."
 "그래서 지금 제가 운이 좋다고 얘기하고 싶은 건가 보죠?"
 
 주현이 팔짱을 끼고 머그컵을 멍하게 쳐다보며 미경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삼켰다.

 '내가 지금 푸념 하면 다 들어줄 건가요?'

 라는 말.

 미경은 대답 대신 그저 머그컵을 들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미경은 컵을 든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그거 알아? 사람들은 생각보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 다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 다른 경험들을 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다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 어쩌다가 말이 나오면 그제서야 '아! 이 사람도 그렇구나' 하고 알게 되지. 또는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고서야 '아!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지."

 주현은 미경의 말을 들으며 말 없이 다시 머그컵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미경은 조금 더 가벼워진 어조로 훈계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럴 듯하다고 아무거나 믿지 말고 의심하라고. 너무 망설여도 안되지만, 그런 이상한 소리는 걸러 들어. 남이 말하는 말 말고 네 현실, 네 인생 살아."

 그 말에 주현은 예전에 미경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주현은 스스로 상처를 후벼 팔 각오를 하고 컵을 내려놓으며 화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관으로 나갔다는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보네요."

 미경은 그 말을 듣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뭐 때문인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둘러대듯 말했다.

 "…하아. 그 새… 아니, 그래. 그런 식으로 들었나 보네."
 "네."

 주현이 신경질적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말이 계속 저를 괴롭히고 있거든요."

 라고 말하고는 진정하려는 듯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는 팔꿈치를 다리 위에 올려두고, 손깍지를 꼈다. 그리곤 마음속의 뭔가를 내려놓은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주현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돌아온 건데요?"
 "너랑 같은 이유지."
 "기적이라도 있었나봐요."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려는 미경에게 주현이 고개를 들어 미경을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미경은 아무런 동요없이 대답했다.

 "맞아. 너처럼."
 "…정말 기적이에요?"

 주현이 의심과 조소, 그렇지만 진지한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현의 질문에 미경의 표정이 아까와 다르게 변했다. 주현은 미경의 그 표정이 도저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경은 몸을 기울여 주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보다 내가 너를 싫어해서 거짓말하고 떠났는지가 더 궁금한 거지?"

 주현은 조용하게 물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혹시… 속마음을 읽어요?"

 주현의 말에 미경은 콧바람을 뿜어대며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지 말고요."

 그 웃음의 의미를 깨달은 주현이 살짝 삐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경이 웃음을 꾹 참고는 있지만,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직도 좀 엉뚱한 데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놓고는……. 말 하는 것만 보면 누나가 사이비 교주잖아요."

 주현이 툴툴거렸다. 
 좀 편해진 분위기에 미경이 킥킥 거리며 물었다.

 "하하. 사이비 교주라니! 웃기는 소릴! 너 요즘 많이 힘든가 보네, 하하!"
 "……."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주현은 농담으로 받아치지 못했다. 주현은 가만히 있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마도요."
 "일 때문에?"
 "뭐……. 그것도 있고요."

 주현은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생각이 너무 많으니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대충 대답하고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미경은 이제 진지한 자세가 되었다. 미경도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그래? 일단, 일은 왜? 혹시 목소리가 안 나와?"
 "아니, 그건 아니고……."
  
 주현은 주저했다. 

 "됐어요. 신경 쓰지 마요."

 주현은 뭐라고 말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미경이 다시 스스로 입을 막은 주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넌 참을성이 너무 좋은 편이란 말야. 책임감도 그렇고."
 "칭찬 고마워요."

 주현이 주변에서 종종 듣는 말에 영혼 없는 기계적인 대답을 하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미경은 진지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칭찬 아냐."
 "네?"
 "그리고 칭찬이라도, 아니. 적어도 나는 너 같은 애한테는 이런 말로 칭찬하고 싶진 않아."

 어느 새 컵을 내려놓고 경청하는 주현에게 미경이 예전 일을 회상하며 팔짱을 꼈다.

 "너, 기억하려나? 내가 처음 항암 치료받았던 날? 그 때 내가 아프다고 힘들어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을 때 너는 공감한다고 했었던 거?"
 "…기억 나요."

 주현도 과거 기억을 회상하며 말했다. 
 미경은 말을 이었다.

 "또 언제더라? 항암 치료 중에 너는 주변 사람 고생 안 시키고 빨리 죽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있었지. 그리고 심지어 네가 나한테 갑자기 고백하고 포기했을 때도 이유가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였어."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자 주현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그 흑역사(주현이 생각하기에)를 지금 당사자의 입에서 듣고 있었다. 때문에 주현은 평소에 얼굴이 벌게지는 것보다 두 배는 더 시뻘겋게 변했다. 주현은 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 기억하고 있네요."
 "지금 다시 듣는 데도 모르겠어?"
 "네?"
 "네 인내심과 포기는 전부 타인을 위한 거잖아."

 그 말에 주현은 생각 못해본 말이었는지, 충격받은 얼굴로 눈이 커졌다.
 미경은 한숨을 섞어서 말을 이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너처럼 배려심 있고, 인내심 좋고, 책임감이 강하고, 또 가끔 그런 자기희생은 좋은 일이긴 하지. 눈치 좋은 것도 그렇고 말야. 하지만, 넌 그게 네 존재와 자아 자체를 지우고 있잖아."
 "……."
 "주현아. 네 행동과 말에, 넌 어딨어?"
 
 미경의 말에 주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미경은 과거 일을 상기시켜주며 말을 이었다.

 "혼내는 거 아냐. 그냥, 잘 생각해 봐. 예전 일이기는 하지만 넌 그 때 고백마저도 그랬어. 네가 날 좋아해서 라는 이유보다 내가 나이 많은 남자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해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의무감이 더 커 보였거든. 네가 아니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 보였어."
 "……."
 "게다가 심지어 넌 네가 좋다고 나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네 스스로 자신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말을 했었지."
 "……."
 "아 물론, 이게 네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아냐. 착각하지 말고."

 미경이 마지막에 혹시나 주현이 착각할까봐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주현은 다행히 착각보다도, 그저 턱을 괴고 입을 가린 채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을 해보고만 있는 듯 보였다.
 미경은 다시 한숨을 섞어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래. 난 네 원망 실컷 들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넌 내 원망 한 마디를 제대로 안 하잖아. 그리고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로 앉아있으면서 결국 아무 말도 안 하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아까 문 열 때도 그랬지? 미안하다는 말 듣자마자 바로 열고 말야! 응? 어쩔 거야? 그렇게 물러터져서? 으이구."

 미경은 마지막은 약간은 장난스런 말투로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다시 인자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내가 왜 칭찬 아니라고 했는 지 알겠지? 내 눈에는 네가 고통받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칭찬하겠어. 난 어떤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 사람한테 그걸 칭찬하고 싶진 않아. 그건 네 고통을 부추기는 거나 다름없는 거니까."

 주현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주현은 먹먹한 눈으로 미경을 돌아봤다. 흐려진 시야 너머로 미경의 걱정어린 얼굴이 보였다.

 문득, 주현은 그때의 미경과 자신이 지금 여기서 살아서 이렇게 대화 하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그간의 세월이 잠깐 사이에 무뎌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약간은 더 나이가 들어서 자신보다 조금 더 어른(주현이 보기에)의 모습인 미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현은 수 년 전에 미경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시의 미경의 나이가 돼도 주현은 그 모습이 될 것 같지 않다 했던 말. 주현은 지금 딱 그 때 그 말대로라고 느꼈다(본인이 느끼기에). 또, 지금 눈앞의 미경 모습에서 또 한 번 그 느낌을 받았다. 내가 저 나이가 돼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느낌.

 주현은 힘겹게 입을 뗐다.

 "…저 힘들어요."

 주현은 그 말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는지, 미간이 인내로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다. 

 "근데 제가 왜 힘든 지, 왜 이러는지, 또 내가 어떻게,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주현은 이미 속으로 많이 곱씹었던 말이었는지, 마른 잉크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경은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에 자격이 어딨어."
 "그렇지만, 저는 아이돌이고 리더니까 더 책임을 지고…"
 "뭔 개소리야. 아이돌이고 리더면 감정이 피해 가?"

 의무감에 반박하는 주현의 말에 미경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답답하다는 듯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사람이야."

 그러더니 결국 미경은 불도저 같은 성격을 못참고 폭발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내가 네 회사 사람이야? 지금 내가 네 팬이자 고객으로 와 있어? 여기가 공식 기자 회견이야? 지금 내가 너한테 표현하지 말래? 아니, 처음부터 들어주겠다고 와있는데 무슨 리더 어쩌구 책임 어쩌구 하고 있는 거야?"

 주현은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마구 쏟아내던  미경은 주현의 얼굴을 보고서야 말을 멈췄다. 미경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미안. 너한테 뭐라하려던 건 아니었어. 내 성격 때문에 못 참은 거야. 미안해. 또 다른 상처를 줘버렸네. 하아……. 정말 미안해. 들어주러 와 놓고는……."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젊어지니까 충동이 너무 심해져서 문제라니까……."

 그러더니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또 못 참고 한 마디 했다.

 "얘, 너 책임감에 질식하겠다."
 
 그 말에 주현이 올라오는 감정을 한 번 억눌러 삼키고는 말했다.

 "맞아요. 내가 그래요, 지금 내가……."

 주현은 한숨을 크게 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마구 쏟아냈다.

 "내 잘못이 아니라도 책임 지고 사과해야 되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해야 된다니까 하는 건데 날 탓해요. 제 잘못이 있는 날도 있지만, 내가 사고 친 것도 아닌데 나더러 뭐라고 할 때도 있어요. 또, 가끔은 나도 지금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는데 나보고……. 하……."
 
 주현은 그간의 일들을 회상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노력 할 수록 점점 허무해져요.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이라서 뭘 해도 그 사람이 정한 등급 안에 갇힌 인간이 돼버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싫어하고, 팬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절 비난해요. 어쩔 때는 내 헌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내 모든 걸 바쳐 노력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때론 제 모든 걸 부정하는 것 마냥 깨부숴버리고…….." 
 "…주현아?"
 "내 말 한 마디, 내 옷, 내 걸음걸이, 전부 다 구설수가 생겨요. 아무 의미 없는 것에도 의미가 부여되고 누군가의 껌이 돼버리더라고요. "
 
 주현은 점점 숨을 가쁘게 쉬며 토로했다.

 "협찬 받아 입은 옷인데 열애설이 생기고, 내가 따라한 게 되고! 그냥 봤는데 제가 싸가지 없는 놈 되어 버린 일도 있다니까요? 심지어는 그냥 예의상 인사하거나 스친 것 뿐인데 며칠 지나니 갑자기 애까지 만들어서 낙태시킨 놈이 되어있고!"
 "자, 잠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보고 나보고 더럽고 역겹다고 하는데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본인들 얘기 아닌가요? 날 도대체 무슨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자기들의 역할극에 날 가져다 세워놓고 있는 것 뿐이잖아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는, 나는…"
 "주현아!"

 미경이 다급하게 주현을 불러 진정시키며 소파에 기대게 했다.

 "헉헉"

 주현은 어느새 과호흡이 와서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동안 고생 많았네. 어디다 말도 못 했을 텐데."

 미경이 주현이 마시던 머그컵을 건네서 음료라도 좀 마시게 하며 말했다.
 주현은 숨을 좀 고르고 음료를 마셨다. 남은 음료를 벌컥벌컥 다 들이키고 난 뒤 말했다.

 "…이런 꼴 보여줘서 미안해요."
 "미안할것 까지야. 내가 미안하지.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얘기하다 그런 건데. 아 그리고! 헛소리로 음해하는 이상한 놈들 있으면 그런 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법정에 세워줄 테니까."

 미경이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치며 호언장담했다.

 "그 고민만큼은 내가 도와줄게! 네 짐을 전부 다 나눠들어주진 못해도 말야. 내가 제대로 골로 보내주지."
 "하하."

 주현은 호기로운 유머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결 편하고 따뜻해진 마음으로 말했다.

 "…오늘 여러모로 고마워요."
 "아냐아냐. 그나저나, 당분간 좀 쉬는 건 어때? 힘들 땐 아무 생각 안 하고 쉬는 날도 있어야지."

 그 말에 주현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 듣고 싶었던 말들을 들어서일까?
 미경은 그 시선에 의아하게 물었다.

 "…왜?"
 "이런 말들을 다른 사람한테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서요."
 "하하. 내가 말해서 실망이야?"
 
 미경이 웃으며 주현이 건넨 빈 컵을 받아서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 앉았다. 
 주현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다시 생각해보니 그래서 더 좋아요. 부모님한테 먼저 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지만요."
 "아, 그건 마음이 아프네. 부모님이 할 말을 내가 뺏은 것 같잖아?"

 미경은 스리슬쩍 주현의 진심을 흘려 넘기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미경은 부모님에게도 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주현이 지금 자신에게 마음이 남아서 또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넘기려 했다.
 하지만 주현은 지금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뺏은 거 아니에요. 누나가 먼저 해서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의미는 무슨. 그냥 위로야, 위로."
 "나한테는 그냥 위로 아니에요. 특별한 사람이 한 위로죠."

 주현은 점점 노골적으로 말했다. 굳이 말꼬리를 잡고 매달렸다.
 미경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주현의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는, 자신의 머그컵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특별은 무슨. 근데 너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컨디션도 그렇고 너무 안좋아보여. 한동안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럴 수 있으면 그래야죠. 쉬는 게 좋아보여요?"
 "응.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럴게요."
 "그리고 사이비 종교 일도 손 떼."
 "누나가 원한다면 당연히 그럴게요."
 
 주현은 미경의 말에 뭐든 들어줄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미경은 자신을 보는 주현의 시선을 피하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그건 과거에 주현이 선물했던 시계였다.

 "오늘 왜 왔냐고 물었지?"

 미경은 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이거 돌려주러 왔어."

 주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경을 바라봤다.
 미경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나한테도 마음 떼."
 "…이럴 거예요?"

 주현은 지금 장난치냐고 말하는 듯한 화가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미경이 자신에게 갑자기 또 비수 꽂는 말을 하는 연유를 알지 못해서 주현은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쉬는 동안 마음 정리 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미경이 나가려는데 주현이 따라 일어났다.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곤 다가가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어떻게 내가 포기해요?"
 "자, 잠깐…!"

 미경이 놀라서 벗어나려 했지만 놔주지 않았다.

 "이상해진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까 그것도 아니잖아요. 오늘 이렇게 해놓고는 정리하라고요? 난 못 해요."

 미련이 철철 넘치는 말로 붙잡았지만, 미경은 이번에는 바로 힘을 줘서 팔을 풀어버리며 말했다.

 "안 돼. 절대."

 주현은 그래도 문 쪽으로 가버리려는 미경을 돌려세워 붙잡고는 거의 애걸복걸하며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날 거부하는 건데요?"
 "넌 여전히 안 믿겠지만, 난 나이가 정말 많아. 나중에 일이 끝나면 자세히 보여주겠지만…"
 "많으면 뭐 얼마나 많다고…"
 "그리고 난 결혼 했어."

 언성을 높이는 주현의 말을 미경이 자르고 말했다.
 그 말에 주현은 미경의 손을 봤다가 다시 피식 비웃고는 말했다.

 "거짓말."
 "진짜야."
 "누구랑요? 혹시 전에 봤던 그 남자?"
 "맞아. 심지어 걔가 나보다 7살이나 어려. 난 특정 사건을 계기로 내가 원치 않았던 약 때문에 젊어진 것 뿐이야. 지금 난 50대야."
 "하."

 주현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비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도대체 이걸 누가 믿겠는가?

 "그러니까 불륜 저지르지 마. 인기 아이돌이 이런 짓 하면 안 된다? 너도 문제 생길 거고 나도 괴로워진다고."

 미경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문장과 '인기 아이돌'이라는 말에 주현은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욱 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주현은 미경의 어깨를 쥔 채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아이돌? 누나, 나 너무 힘들어. 힘들다고! 좀 전까지 들었잖아요! 봤잖아요! 숨도 못 쉬겠다고!"

 라고 뒤로 갈수록 언성을 높이더니, 결국 소리 치는 걸로 말을 끝냈다.
 미경은 그런 주현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미경은 그런 주현을 진정시키려 하며 말했다.

 "주, 주현아? 잠깐만 진정하…"
 "진정? 누나, 거짓말이나 그만 해요!"

 주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미경의 손을 확 낚아채서 들어올리며 말했다.

 "결혼 반지는 어딨는데요?"
 "그건 그냥 슬슬 나이 드니까 손 두꺼워지고 안 맞아진 거랑 일 때문에 불편해서 벗어둔 건데……."

 미경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는 와중에도 주현은 비웃음으로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그걸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하게도 주현은 안 믿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제발!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라고요! 그렇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 거에요! 왜?"

 절규에 가깝게 소리치며 매달리는 주현의 반응에 놀란 미경은 주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아니, 자, 잠깐……. 일단 놓고 진정해 봐."
 "내,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요? 지금?"
 "난 지금 진실만을 말 하고 있는 거야."
 "진실? 지금 진실이 어딨는데요?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돌아온 사람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요?"

 그 말에 미경이 엄청나게 짜증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중얼중얼했다.

 "하, 씨, 신현석 그 *끼 때문에…"
 "그 남자에요? 신현석?"
 "뭐?"
 "남편이냐고요." 
 "아냐!!!"

 미경이 질색을 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미경의 반응에 깜짝 놀란 주현이 얼빠진 틈을 타서 미경은 주현의 손을 자신에게서 떼내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슬퍼도, 믿을 수 없어도 미안하지만 전부 진실이야. 지금은 안 되지만 때가 되면 무슨 일인지 네게 자세히 보여주고 말해줄게."
 "아니, 누나…"

 애절한 목소리로 붙잡으려는 주현의 손을 미경이 도중에 붙잡았다. 그리고 주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밀어냈다. 
 주현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힘 없이 거부당하는 손을 바라봤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미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경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널 받아줄 수 없어. 난 결혼 했고, 너랑 불륜 저지를 생각도 없어. 네가 마음정리 해야 돼. 잊어."

 그렇게 말하고는 밀어내던 주현의 손을 놓고는 뒤로 돌아 걸어 나갔다.

 "그럼 푹 쉬어."

 미경은 그 말을 남기고 주현의 집을 떠났다.
 빈 집에서 다시 또 버려진 주현은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뗐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주현은 혼자 뿐인 빈 집에서 서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절규하며 말했다.

 "난 그런 거 몰라……. 잊을 수 있었다면, 마음 정리라는 거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거야……."

 주현은 새롭게 얻은 타격에 감정과 마음이 마구 휘몰아쳤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 잊으라는 거야…?"



사르르

 완전히 부서지고 깨져버린 정신은 잘게 부서진 유리가 모래처럼 변한 것처럼 가벼운 바람에도 흩날렸다. 



그 때,

삐삑-

「우리 후배님~ 요즘 잘 지내? 오늘 우리 가게 행사인데 관심 있으면 올래? 행사 아니라도 쉬고 싶거나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놀러 와!」

 그룹 Bad의 멤버 엠피(M.P.)의 연락이 왔다. 그동안 이따금씩 오던 그런 흔한 연락이었다. 그동안은 그냥 넘기던 연락이었으나, 깨져버린 주현에게 그 연락은 솔깃한 지푸라기가 되었다. 그 지푸라기로 주현은 지금껏 없었던 균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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