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신의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장신의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본 우펜자는 술이 확 달아났다.
"나, 나는……. 아니, 난……. 나만, 아니, 어……."
"네?"
"미안해요."
우펜자가 갑자기 사과를 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우펜자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버렸다.
"잠깐만!"
장신의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때, 때 마침 통금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펜자는 장신의 남자를 남겨두고 자신이 어디가는 지도 모른 채 달렸다.
"잠깐만!"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가 뛰어나가자 그를 뒤쫓으려 가게 밖으로 따라나갔다.
하지만 이미 그는 통금 호루라기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가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가게 밖에서 서있던 옥실에게 호들갑을 떨면서 물었다.
"오, 옥실아? 이, 이거 어쩌지? 큰일 났어."
"어휴……."
"내 잘못이야. 어떡하지?"
장신의 남자가 자책하기 시작했다.
"우펜자가 날 사랑해서 돌아가기가 싫데. 내가,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잘못했어……. 어떡하지?"
"……."
"돌아가기가 싫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옥실아? 내, 내가, 내가 우펜자한테 무, 무슨 짓을 한 거지?"
장신의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지 말랬죠!"
옥실히 소리를 화를 냈다.
"옥실아, 어떡해? 어, 어떡해야 하지? 내가, 내가 우펜자를 망쳤어. 내가……."
장신의 남자는 완전 패닉에 빠져버렸다.
"옥실아, 어,어떻게 해야 돼? 아니, 어떻게,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거 대형 사고 아냐? 그, 그런 것 같은데?"
"네. 대형사고 맞아요. 아주 제대로 사고 쳤네요."
"아……. 안 돼……. 옥실아 어,어떡해? "
장신의 남자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그 때 그렇게 시끄럽던 사이렌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옥실아, 어, 어떡하지? 처, 처음부터 그냥 내가 없었더라면……. 내 잘못이야……."
"제가 계속 경고했잖아요!"
"옥실아, 어떡해?"
그는 여전히 패닉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어?"
옥실이 화를 내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옥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펜자가 뛰어나간 방향을 쳐다봤다.
"이런. 젠장."
'착각? 아니야. 착각도 아냐.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잖아. 내가, 내가 문제야. 내 잘못이야.'
마타마이니의 빛나는 위성 아래, 우펜자는 사이렌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를 들으며 숨이 턱 끝에 닿을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사이렌 소리가 멎을 때 쯤, 결국 숨이 너무 차서 멈췄다.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헉헉……."
우펜자는 고개를 숙이고 갑자기 달려서 아픈 옆구리를 부여 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이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가쁜 숨소리는 점차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땅바닥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 왜 울고 있는 거야? 뭐 잘 했다고?'
그러면서도 우펜자는 자꾸만 장신의 남자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장신의 남자의 당황한 표정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난 정말 이기적 놈이야. 그 잘못을 해놓고도 앞으로 미안해서 슬픈 것 보다 앞으로 못 본다는 게 더 슬프다니!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그게 서럽다니……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
우펜자가 스스로를 원망하다가 다시 허리를 폈다.
휙
그 때 갑자기 우펜자의 눈이 가려졌다.
"읍읍"
우펜자의 입도 가려졌다.
그리고 미처 제대로 버둥거리기도 전에 팔다리가 묶였다.
"이런. 젠장."
옥실이 욕을 했다.
"큰일 났어요."
"응. 큰일이야. 어떡하지?"
"아니. 더 큰일 났어요."
"어?"
"우펜자를 납치하려는 것 같아요."
"뭐?"
옥실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몸에 모든 핏기가 사라져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미행하고 있던 놈들, 그 놈들이 우펜자를 납치 하고있어요."
"뭐…?"
옥실이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완전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 같았다. 이젠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 옥실아… 도와줘……."
장신의 남자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옥실에게 매달렸다.
"……."
"옥실아, 바, 방법 있지…? 그렇지? 제발, 제발 도와줘……."
"…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
"아니면 늦어지거나……."
"늦어지는 건 괜찮아."
장신의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옥실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우펜자만 데려와요. 이쪽으로 계속 달려 나갔으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다른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부탁할게."
장신의 남자가 통금 때문에 살벌하게 조용한 거리로 뛰쳐나갔다.
우펜자는 납치범들에게 포대 같은 것에 담겨져서 끌려갔다.
'그래.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타국에서, 이렇게…….'
우펜자는 끌려가며 생각했다.
그리고 우펜자는 자신이 차 같은 곳에 짐짝 던져지듯 던져진 것이 느껴졌다.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뭐. 억울할 것도 없네. 다 내 탓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다 내 잘못이니까. 내 죄 때문이야. 그래, 그렇지.'
우펜자는 이미 눈이 가려 깜깜한 와중에 이젠 스스로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살아있는 것 보다는…….'
그때 차가 멈추는게 느껴졌다.
우펜자의 몸이 들리더니 납치범 두 명이서 들고 옮기는게 느껴졌다.
쿵
우펜자가 바닥에 던져졌다.
휙
그 때 우펜자를 싸고있던 포대가 벗겨진게 느껴졌다.
턱
의자 같은 것에 앉혀졌다.
그리고 입을 막고 있던 것이 풀렸다.
"무슨 이유로 그 남자와 접촉하고 있지?"
아즈어였다.
납치범 중에 하나가 아즈어로 우펜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
"그 남자와 무슨 관계지?"
"무슨…?"
"그 남자의 자금은 어디서 났나?"
"네?"
우펜자는 그들이 도대체 뭐에 대해서 묻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 남자?"
"너와 계속 만나던 그 남자! 좀 전까지 같이 술 마시던 놈!"
"아……."
우펜자는 그제서야 그들이 장신의 남자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구레아에 온 거지? 해방 운동이라도 하려 했나?"
"그게 무슨…?"
"아니, 도대체 누구야? 그 놈은?"
그 사람도 어지간히 답답한듯한 목소리였다.
"이름이 뭐지? 나이는? 어디 사는 놈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우펜자는 갑자기 띵- 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아니, 많은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 때 9구역 공용어로 아즈어를 하는 사람에게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좀 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야……. 너무 급하게 물었지?"
"……."
"자자, 우리 시간 낭비 하지 말자고. 빨리 말하고 그냥 가면 돼. 우린 당신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한 게 없거든. 당신은 이력이 깨끗하단 말이야……. 그 놈에 대한 정보만 넘기면 안전하게 보내주지. 당신도, 당신 고향에 있는 사람들도."
"네?"
그 말에 우펜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아, 걱정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지금까지는 아무도 일도 없었어. 우린 무고한 이들은 건드리고 싶지는 않거든."
"……."
"물론 네가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한다면 우리도 생각이 달라져. 자, 그러니 협조만 해주면 돼."
우펜자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났다.
"하나씩 차근 차근 묻지. 그 녀석 본명이 뭐지?"
"본명…이라니요…?"
우펜자의 반응에 그들이 또 수군수군 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다시 아즈어를 쓰는 사람이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가명을 썼겠지."
"……."
"그래. 우리가 시간낭비하고 있군. 미안하네."
갑자기 사과를 했다.
"누구한테서 돈을 받고 있던가?"
"그게 무슨…?"
"우린 자금줄의 출처가 궁금해. 아는대로, 들은 대로 다 말해. 어디서 난 건지."
"저, 저는 전혀 들은 바가……."
우펜자가 대답하다가 순간 답변을 멈췄다.
가끔씩 장신의 남자와 대화 하던 중에 그가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뭔가 그도 사정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알고 있군."
납치범의 말투가 어조가 차갑게 변했다. 우펜자의 그 순간의 머뭇거림을 캐치한 것이었다.
우펜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끌러졌다.
"헉."
우펜자의 눈 앞에 있는 수 많은 고문 기구가 보였다. 우펜자 주변으로 3명의 납치범들이 곁에 서있었다.
그들 중 좀 떨어진 한 사람이 그 고문 기구를 집어들었다.
"자, 다시 말하지."
우펜자 바로 옆에 서 있는 납치범이 아즈어를 하며 말했다.
"아는 대로 전부 말해."
장신의 남자가 뛰어가다가 이대로는 늦겠다고 생각했다.
"젠장. 차 같은 거 없나?"
그렇게 중얼 거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저 앞의 한 집에 뜬금 없이 말들이 몇 마리 눈에 띄게 묶여 있는게 보였다. 그 집은 안쪽에도 마구간이 있는 큰 규모의 집이었다. 보아하니 말을 타고 온 사람이 지나가다가 통금 때문에 그 집에 잠시 묵으러 온 김에 거기 매어둔 것 같았다.
"…나 말 탈 줄 모르는데."
장신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말한테로 다가갔다.
장신의 남자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말이 매여 있는 끈 중에 하나를 풀었다.
"푸르르르르"
끈을 당기자 말 하나가 그의 손에 이끌려졌다.
장신의 남자는 이런 어두운 밤중에 마타마이니의 위성 불빛으로만 봐도, 잘 길들여지고 관리된 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말한테 장착된 마구도 죄다 고급스러운 것이 보통 값나가는 물건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부자의 말인 모양이었다.
장신의 남자는 나름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바로 올라타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역시 처음이라 실패해서 한 번 헛발질을 하게 됐다. 말이 기분 나쁜 듯 히히힝 거렸다. 메여이쓴 여러 말들 중에서도 하마터면 꽤 크고 난폭해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다음 시도는 성공해서 바로 말에 올라탔다.
말을 타고 가다가 바닥에 뭔가 반짝이는걸 발견했다.
"어?"
장신의 남자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 반짝이는 것 옆에 말을 세웠다. 그리고 그 물건을 바로 알아보고 말에서 내려 주웠다.
그건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에게 사준 시계였다.
"젠장. 이러면 어디 갔는지 어떻게 알아?"
장신의 남자는 이대로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말을 다시 타고 달렸다.
그리고 이내 누가봐도 납치를 했다하면 저기 있을 것 같다하고 의심되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민가가 드문 공장 지대였다. 통금 때문에 이 지대는 죄다 깜깜했다. 그런데 한 목조로 건축된 소규모 공장 건물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본가?"
장신의 남자는 그곳이 당연히 통금 시간에는 사람이 없으니 은밀하게 뭔가 하기에는 적절한 장소일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하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거칠게 말을 몰아서 그 공장으로 돌진했다.
"어? 말 발굽 소리가 들리는…"
납치범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우지끈
문쪽으로 말로 그대로 들이박아서 문짝과 옆에 딸린 벽이 박살이 났다.
안에 있던 납치범들이 혼비백산해서 피했다.
"뒤져라, 십새끼들아!"
장신의 남자는 우펜자가 생전 처음들어보는 언어로 그렇게 소리치면서 말을 몰았다. 장신의 남자는 그 목조 주택을 박살내고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말에게 뭐라뭐라 명령하듯 소리쳤다.
말은 유려한 방향전환으로 콧김을 뿜어대며 돌진했다. 마치 투우를 하는 황소처럼 마구 들이박았다. 보통 말은 예민한데, 이 녀석은 예민과는 거리가 먼 녀석인 듯 했다. 내면에 야생마의 파괴 본능이 생생히 살아 있는 녀석인 듯 했다. 말 본인도 신난 듯 장신의 남자의 고삐 움직임에 따라 완전 미쳐 날뛰었다.
마타마이니 행성을 비추는 푸른 유백색의 꽉 찬 위성의 역광 아래, 그의 형상이 검게 실루엣으로 보이다가 말이 방향을 트는 순간 장신의 남자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는 말을 모는게 재밌어서인지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검은 말에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웃고 있는, 그야말로 광기가 서린 마왕 그 자체였다.
장신의 남자는 말로 그 납치범들을 차례로 들이박고는 우펜자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그를 속박하고 있던 끈을 풀고는 다시 말에 올라 타며 물었다.
"말 탈 줄 알아요?"
"아뇨."
우펜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에 올라탄 장신의 남자를 바라봤다. 위성의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하얀 빛 아래 그의 모습은 넋이 나갈만큼 훤칠하게 보였다.
'날 홀리러 온 악마, 아니 마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잘됐네. 이참에 타봐요. 재밌으니까."
장신의 남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위성의 빛에 비친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였다.
"잡아요."
장신의 남자가 말에 앉아 우펜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펜자가 그의 손을 잡았다.
'동화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검은 말이지만.'
우펜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꽉 잡아요. 빠를거니까."
장신의 남자가 경고했다. 우펜자가 장신의 남자의 말대로 꽉 잡자마자 바로 말을 급발진 시켰다.
경고한 그대로 말을 미친듯이 빠르게 몰았다.
"와하하하!"
장신의 남자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말을 몰면서 마구 웃었다.
"짜릿하지 않아요!? 하하하하하"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쪽으로 슬쩍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우펜자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장신의 남자가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내 등만 보고 있지 마요!"
"네?"
"지금 도망치고 있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말라고요!"
"……."
"지금을 즐기라는 소리에요! 옆에 봤어요!? 밤 풍경 죽이잖아! 하하하하하"
그 말에 우펜자는 그제서야 구레아의 밤 풍경을 바라보게 됐다.
달리는 말 위에서 위성의 어스름한 빛 아래 고요한 구레아의 풍경은 참 이국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그러자 우펜자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밌죠!?"
"네! 짜릿하네요!"
그들은 밤거리에 웃음 소리를 흘리며 질주했다.
이윽고 그들은 학교에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학교 앞에서는 옥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실은 우펜자의 짐을 다 꺼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내 짐을 왜…?"
우펜자가 의아해 하고 있는데,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에게 시계를 건넸다.
"시계 빠뜨렸죠?"
"앗."
우펜자가 시계를 건네 받았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가 주머니에 다시 시계를 넣는 것을 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네?"
우펜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장신의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서글퍼보였다.
"나 때문에 위험하게 해서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 놈들한테 내가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알아요. 나쁜 짓 할 사람 아닌 거 알아요. 그리고 난 괜찮아요."
"아니요. 저 나쁜 짓 한 거 있어요."
장신의 남자가 이젠 정말로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우펜자씨, 돌아가요. 다 내가 책임질게요. 다 처리할테니까 돌아가야 돼."
"네?"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나도 곧 떠날 거예요."
장신의 남자의 말에 우펜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니요. 미안해야할 사람은 나야, 우펜자씨."
"네?"
"전 우펜자씨 당신 만나러 온 거에요. 당신 만나러 올려고 전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네…?"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난게 잘못이었어요. 미안해야 할 건 나에요."
"아니에요! 제, 제가 잘못……."
그 때 옥실이 말했다.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말을 갖다놔야되요. 우펜자씨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항공권이 막히기 전에 떠야되요."
장신의 남자가 옥실의 말에 우펜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잘 들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마음도."
"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잘못일 수가 있겠어. 그리고, 고마워요. 날 좋다고 해줘서."
"……."
"그렇지만 미안해요. 난 당신과 같은 감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아.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요. 당신 말처럼 성별을 떠나서, 우펜자씨 당신 자체로. 그래서 난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어."
장신의 남자의 말을 들으며 우펜자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당신이 안 좋은 일을 겪고 여기 남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야. 난 당신이 행복하고 잘 됐으면 좋겠으니까. 당신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또 당신을 존경해요. 그만큼 괜찮은 이니까. 그러니까 돌아가요."
우펜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를 안아줬다.
"내가 믿고 있으니까, 이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행복하게 지내요. 잘 지내요."
우펜자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안고 있는 장신의 남자를 안았다.
"나중에 봐요."
장신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뗐다.
"…옥실아."
"네에. 갔다올게요."
옥실이 우펜자의 짐을 들면서 말했다.
떠나려다가 장신의 남자가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머리 한 번만 쓰다듬어 주면 안되요?"
우펜자가 영문을 모른 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신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짓고는 말에 다시 올라탔다.
"그럼 잘가요."
우펜자는 멍하니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
"…데려다 드릴게요."
"잠시만. …잠깐만."
"가야되요. 시간이 없어요."
"잠깐만 도서관에 갔다 갈 수 있을까? 5분이면 돼."
"…그러세요."
우펜자는 동트는 새벽빛을 보며 고속 항공기체를 타고 아즈국으로 돌아갔다. 모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즈 공항에 내릴 때가 되어서야 그는 눈물을 겨우 거두고 내렸다.
"형님……."
"어?"
공항에 도착하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를 배웅하러 와있었다.
"토, 토비아스? 어떻게…?"
토비아스가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곧이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토비아스가 그의 앞에서 고개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우펜자는 말 없이 울고 있는 토비아스에게 다가가 안아줬다.
긴 밤이 지나고 구레아의 학교에 동이 어스름하게 터오고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터덜터덜 학교로 걸어왔다. 옥실이 학교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됐어?"
"네."
"…가야되지?"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요."
옥실이 도서관 문을 열었다. 장신의 남자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책에 남겨놨어요."
"무슨 책인데?"
"아실걸요."
"뭐?"
"이거요."
옥실이 가르키는 책을 보자 장신의 남자는 멈칫했다.
그 책은 우펜자와 장신의 남자가 처음 만난 날, 우펜자가 펴놓고 잠들었던 책이었다.
장신의 남자는 울컥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책을 빼내서 열었다.
책 안에는 종이가 있었다.
그 종이는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의 노트에서 떼낸 종이였다. 그 종이는 장신의 남자가 우펜자가 잘 때 뭔가를 써놨던 그 페이지였다.
장신의 남자는 그 종이에 우펜자가 남긴 글을 읽었다.
지금껏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떠나야돼요.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가자."
장신의 남자가 책을 다시 꽂아놓고 종이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옥실의 손을 잡았다.
종이가 다 탈 때 쯤엔 그들은 사라졌다.
도서관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이, 그렇게 사라졌다.
종이가 활활 타고 그을음에 가까운 까만 재만 바닥에 부스러기로 남았다.
쿵
"야! 이런 미친!"
장신의 남자의 욕지꺼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아, 제대로 안 될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옥실이 소리쳤다.
그들은 어떤 화단에 처박혀 있었다.
주변이 깜깜해서 잘 안보이다보니 엉뚱한 곳을 자꾸만 짚고 있어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옥실이 화들짝 놀랐다.
화단에 떨어져 있던 그들 옆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조, 좋은 밤이죠?"
장신의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옥실은 그 남자를 보가 마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듣던 대로 동탕한 인물이라 했다.
또 누군가는 말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말간 얼굴에 눈에는 영채가 도는 것이 밤에 보아도 그가 틀림 없었다고.
옥실과 장신의 남자 앞에 눈에 띄게 미남인 사람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젠장! 하마터면!'
옥실이 속으로 욕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옥실이 도움을 요청했다.
"도, 도와주시겠어요, 왕자님?"
마타마이니력 4265년, 당대 구레아 왕실 제일 미남이었다는 왕자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