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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그 선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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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그 선생

SooyangLim 2020. 12. 28. 22:25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빨리 와요!"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요!"

 고개를 들자 옥실이가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장신의 남자는 한결 풀린 표정으로 옥실에게 다가갔다.

 "옷은 또 언제 가져온 거야?"

 옥실의 한쪽 손에 들린 외투와 모자를 보며 말했다.

 "헤헤······."

 옥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차림이니 다들 쳐다보더라구요. 아무래도 따뜻하게 보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요."

 아무래도 쌀쌀한 날씨에 셔츠만 입고 있어서인지 시선을 인식한 것 같았다.

 "옷 살 여유도 있었던 것 보면 일찍 나왔나 보네."

 장신의 남자는 미소를 띠며 말했지만, 약간은 뼈가 있는 듯한 말을 했다.

 "···어떻게 한 거야?"
 "아 그거야 뭐··· 여러 가지 방법을 썼겠죠?"


 장신의 남자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옥실은 뭘 묻는지 바로 눈치챘다.
 옥실은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 폭탄이야 뭐 비상사태니까··· 눈 앞에서 보게 할 수는 없잖아요?"

 옥실은 '비상사태'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 거리에서 가능한 거냐?"
 "괜한 데 관심 그만 가지고 이제 제발 돌아가요."

 장신의 남자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옥실은 그의 관심을 싹둑 잘라버렸다.

 "싫은데? 지금 안 갈 건데?"
 "아 진짜! 감당할 수 있어요?"

 그들은 텅 빈 밤거리를 걸으며 옥신각신 했다.

 "급하면 네가 또 비상사태라 치고 도와주면 되잖··· 어?"

 장신의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얘기하던 중에 갑자기 검게 닫힌 시야에 당황했다.


 "뭐, 뭐야!? 옥실아!?"

  옥실을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어? 아니, 야! 이거 놔! 야 읍읍"

 누군지 모를 이들이 시야를 차단시키고,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곤···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쯤, 장신의 남자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어딘가의 바닥에 포대 떨어뜨리듯 내던져졌다.

뚜벅뚜벅

 여러 사람의 구두 발굽 소리가 들렸다. 옥실이의 구두 굽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대충 몇 명쯤 있나 가늠해보려 했을 때 자신의 바로 앞에서 카랑카랑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뵈었으면 한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엔 난처함과 난감함,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거칠게 대해서 미안하오."
 
 그는 좀 더 격식 차린 톤으로 말했다.

 "옥실아? 이게 대체···"

 장신의 남자는 사과에는 대답하지 않고 옥실이에게 물었다.
 그는 어금니가 갈릴만큼 화를 꽉꽉 눌러 억누른 목소리 톤과 어리둥절한 톤이 섞여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직접 하지 않고는 이 방법이 가장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높아서요······."

 옥실이의 기어들어가지만 확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여전히 억누른 톤으로 비아냥 거렸다. 

 "그래서 그게 납치당하게 하는 거다?"
 "아니, 납치할 생각은 아니었소. 미안합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직접 뵐 수 있으면 좋겠다는 듯한 뜻으로 모셔올 왔으면 한다 했는데······. 의미 전달이 잘못됐던 것 같소. 진심으로 사과하오. 부디 용서 바라오."

 진심 어린 사과가 이어졌다.
 장신의 남자는 그의 말에 무언가 그들 사이에 무언가 소통이 잘못돼서 이 상황까지 왔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화가 누그러지는 것도 아니었고, 이 상황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소리 할 거면 얼굴이나 보고 하지 그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이 상황에 대해 가장 원초적이고 날카로운 불만을 제기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구레아 국민도 우주 9구역만큼 상급 교육을 받길 원했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침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신의 남자는 갑자기 왜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 몰랐지만, 일단 잠자코 듣고 있었다.

 "허나 그대가 개교식에도 봤던 우리의 동지는 우리가 아닌 저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에 반발했소이다. 심지어 그들의 입맛에 맞춰 우리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일환의 과목을 개설애 교육하는 것을 굴욕이라 여겨 매우 치욕스러워했소이다."

 장신의 남자는 죽은 옆 칸 사람을 떠올렸다.

 "게다가 우리를 침탈하고 수만 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선 자가 연단에 오른다는 것에 그는 매우 분노했소이다. 그래서 그는 폭탄으로 학살자를 죽이고 학교 자체를 폭파하려고 계획했소."

 장신의 남자는 지금껏 추측으로만 알 수 있었던 폭파 사건의 동기를 확실하게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이 상황의 아귀를 맞춰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아까보다 더 화가 누그러진 말투가 되었다.

 "아하······. 당신들이 한 패였구만. 그래서? 잘 안돼서 날 데려왔나?" 
 "아니오. 그는 나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나는 반대했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단호하게 장신의 남자의 추측을 부정했다.

 "비록 반쪽짜리 교육기관이긴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뜻을 모았고 간절히 원했었소. 설사 반쪽짜리일지라도 나도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일단은 학교가 설립되길 바랐소."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반쪽짜리라도 그들을 몰아내고 우리가 차차 일구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소이다. 나는 그리 뜻을 전했고 그도 단독으로 학살자만 제거하겠다고 내게 뜻을 전했소이다."

 그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문득 죽은 옆 칸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올 줄 몰랐다고 했었지······. 그게 이 말이었나? 그럼 그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 사람인가?'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소."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톤이 지금껏 차분하게 설명하던 톤과는 살짝 달라졌다.

 "당신의 저 소년이 도움을 요청했고 반드시 보답하겠다 약조했소이다."

 장신의 남자는 옥실이가 손을 쓴 과정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톤이 변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대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알아보던 중에 의문이 생겼소. 학교 설립을 위해 그 큰돈을 기부해 후원 명단에 오를 정도인 사람이 어찌하여 우리가 아무리 수소문해도 그대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정적이 흘렀다. 
 이제 해명해야 할 바통이 장신의 남자에게로 넘어왔다.

 "···나는······."

 장신의 남자는 고민 끝에 입을 뗐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임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그 학교에 올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이곳으로 왔어."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의심스럽게 보이겠지만··· 하지만 절대 나쁜 목적이 있다거나 당신들을 방해할 생각은 아냐."

 그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해명하듯 말했다.
 
 "그날 일은 그냥··· 용변이 급해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휘말린 것뿐이야." 

 그는 '똥 마려워서'라고 말할 뻔 하다가 좀 더 용어를 정제해서 말했다.

 "약속대로 보답할 수 있는 건 확실히 보답하도록 할게."
 "···알겠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석연치 않아함이 느껴졌다. 그는 계속 의심스러운듯한 말투였지만, 일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우···아니, 아직은······. 곧 학교로 올 건데··· 나도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
 "알겠소."

 길게 말은 했지만 의혹이든 뭐든 아무것도 해명이 안 된 답변들이었다.
 그는 그냥 체념하듯 말했다.

 "이만 풀어드리겠소이다."

 옆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오."

 그는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아, 내 이름은 장진이오."
 "장진?"

 장신의 남자는 그 이름을 듣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흔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 치고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장신의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아, 그리고 여기는······."

 무릎이 꿇려진 채로 듣고 있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장신의 남자는 밝아진 시야에 미처 적응도 되기 전에 얼른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그를 본 순간 장신의 남자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가 장신의 남자의 말을 전혀 믿지 않고 가명을 썼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지난(나라 이름)의 산해(도시 이름)요."

 '해방 운동가 범백!'


 장신의 남자는 지금까지 쌓였던 온갖 불만과 잡다한 생각들이 싹 잊혀졌다.

 "···할게요. 꼭! 돕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갑자기 큰소리치며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서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열심히 돕겠습니다! 자금이든 정보든 뭐든 간에 열심히 보답하겠습니다! 뭐하면 좋은지 알려 주···아"
 "···아니······."
 "아참······."

 흥분해서 마구 소리치던 장신의 남자는 잠시 망각했던 옥실의 존재를 깨달았다.
 옥실은 그가 소리치는 것을 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아,아니,그,그래도···서로 돕고 사는 게 좋으니까······."

 장신의 남자는 옥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도울 건 돕고 보답할 건 보답하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범백에게 이야기하는지 옥실에게 얘기하는지, 계속 옥실의 눈치를 살폈다.

 "옥실이가 보답한다고 했으니까···그,그렇지? 옥실아? 그러니 보답···할게요? 응?"

 마지막엔 거의 옥실에게 허락을 구하듯이 말했다.
 
 "뭐···그리 하시구려."

 범백은 눈치 보는 그를 보며 손해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그러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지나치게 끄덕거리며 꼭 지키겠다는 필사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옥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미안했소."

 장신의 남자를 포박해 데려온 사람들이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학교 쪽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 * *

 "돈만 좀 지원하고 나오면 되는 데 왜 또 일을 벌여요!?"

 학교 앞으로 돌아와 동행하던 이들이 떠나자마자 옥실이 짜증을 냈다.

 "미안···범백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장신의 남자가 사과하다가 대로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그쪽을 바라봤다. 


 천으로 된 용수가 뒤집어 씌워진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경찰을 따라 줄줄이 연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옷과 용수에는 말라 붙은 핏자국과 방금 베어 나온 핏자국이 잔뜩 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장신의 남자를 보며 옥실이 입을 열었다.

 "···폭파 사건 이후에 보복으로 관계없는 이들에게도 가하던 학살과 고문이 아직도 진행 중인가 보네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죠."

 장신의 남자는 옥실을 바라봤다.
 옥실은 장신의 남자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그러니 제발 조심하시고 운 좋은 줄 아세요. 진짜 힘들게 빼낸 거니까."
 "···우펜자는 언제 와?"
 
 장신의 남자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옥실이 대답했다.

 "이제 곧 올 거예요."



 며칠 뒤 저녁 무렵-
 


 "옥실아."
 "네?"
 "곧 온다며?"
 "네 곧 와요."
 "우리 지금 매일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거든?"
 


 그들은 학교 도서관의 책장이 가득한 구석에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불만을 토로하는 동안 옥실은 책장에서 초판본 책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제가 뭐 주인님인 줄 아세요? 감지덕지하셔야지······. 일 벌여놓고 바라는 게 많으시네."

 옥실은 투덜거리는 장신의 남자의 말을 받아쳤다.
 그 말에 장신의 남자는 멋쩍어졌다.

 "아니, 그건······. 근데 너 정확한 거 아니었냐?"
 "없는 거 만들어 낼 순 없죠. 예측은 하지만요."

 옥실이 대꾸했다.
 그때 옥실이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

 옥실은 가만히 서서 뭔가를 감지한 듯 눈알만 싹 돌렸다.

 "아."

 옥실은 책상들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우펜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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