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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남은 것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남은 것

SooyangLim 2021. 10. 18. 19:01

 "…해방이구나."

 설참이 나즈막히 말했다.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설참은 결국 살아서 두 눈으로 목격했다. 바깥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려왔다. 

 기뻤다.
 분명 지금 설참은 기뻤다.

 "……."

 아무도 없는 집이 설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앞이 천천히 흐려져왔다. 
 
 기쁜데, 행복하지 않았다.
 
 "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외마디가 새어나왔다. 벽에 기대 있던 설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아래로 떨어져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쏴아아-

 더운기를 가시게 하는 비가 내렸다. 슬슬 후덥찌근한 날씨가 물러가는 중이었다. 

 "…우리 구레아는 독립을 맞이했지만, 구레아를 분할해 대리 통치를 하겠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설참은 여전히 구식 통신기기를 들으며 맨바닥에 쓰러진 듯 누워있었다. 설참은 통신기기에서 들려오는 말에 몸을 일으켰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참은 앵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에 얼마 전 구레아로 들어온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중 범백과 김원이 만남을 갖기로…"

 그녀는 김원과 범백의 소식을 듣자 간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에 나섰다.



 "해방 이후로 처음 보는구려."

 범백이 그를 찾아온 그녀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물을 끓이며 말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렇지."

 범백은 찻잔을 내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이 마른 것 같소."
 "그래 보이십니까. 아닙네다."

 설참은 끓고 있는 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나라를 나눠서 대리 통치한다는 말이 들리던데 어찌 된 것입니까? 해방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막아야지 않겠소."
  
 범백은 한숨을 섞어 쉬며 말했다. 범백은 끓인 물을 다관에 옮겨 담았다.
 찻잎을 우리며 범백이 설참에게 물었다.

 "아참. 그나저나 그대가 오면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말이오."
 "어떤 것 말입네까?"
 "일전에 우펜자를 만났었소. 우펜자를 알고 계시오?"
 "우펜자. 당연히 알고 있습네다."  

 설참은 우펜자가 유명한 인물이라서 아는 것도 있지만, 종종 장신의 남자와 대화 했을 때 들어서 알고 있기도 했다.
 범백이 서로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우펜자가 찾는 이가 있소. 근데 설명을 들어보니 우펜자가 찾는 이가 그대를 좋아하는 그 자라고 생각했소."
 "……."
 "난 사실 둘이 같이 올 것이라 생각해서 오면 물어보려 했었는데 말이오." 
 
 범백의 말에 설참은 장신의 남자가 자신에게 말해줬던 우펜자와의 일화들이 떠올랐다..
 
 '…그랬었지. 우펜자는 내가 자신감을 채워줬니 어쩌니 했지만, 난 잘 모르겠어. 내가 그냥 괜한 일을 한 게 아닐까 싶어.'

 설참은 장신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늦은 밤, 장신의 남자가 구식 통신기기를 같이 들으며 우펜자의 소식을 듣고 그가 우펜자와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 해주곤 했었다. 아직도 그의 모습이 설참의 눈에 아직도 선했다. 
 설참은 조용히 입을 뗐다.

 "…아마 찾는 이가 맞을 겁니다.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네다."
 "정말이오!?"
 "구레아에 우펜자가 왔을 때 자주 봤었다 얘기했습네다."

 설참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그랬군! 그러면 혹시 찾는다 전해 줄 수 있겠소?"

 범백의 말에 설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전하지… 못… 할 수도… 있습네다……."

 설참은 미련인지 뭔지 모를 실낱같은 희망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아직도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범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소?"
 "……." 

 설참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찻잔 안에 그녀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설참이 숨을 고르려 애쓰며 겨우 말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놨다.

 "…왕자님께 가려고… 길을… 나섰었습니다. 그날… 헤렌스만에 행성에 간다고……."

 설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범백은 설참이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말 없이 눈물을 닦을 천조각을 찾아 건네주었다.

 "…혹시 모르니 사상자와 생존자 명단을 찾아봐주겠소."
 
 범백이 말에 설참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범백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평소에도 개의치 말고 들러서 차 한 잔 하러 찾아오시오."

 

 설참이 퉁퉁 부은 눈으로 계속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범백이 있던 곳의 문을 열려고 다가오던 이가 갑자기 설참에게 다가왔다.

 "범백 선생께서 경이라도 치셨습니까?"

 설참이 그제야 자신의 곁에 다가온 이를 쳐다봤다.
 김원이었다.

 "무슨 일이오?"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설참은 깜짝 놀라 우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이제와서 숨긴다고 숨겨지는 건 아니지 않소?"

 김원이 그렇게 말하며 설참이 얼굴을 돌린 쪽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설참은 당황해서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김원은 그녀가 뭔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설참에게 말했다.

 "…아이를 가졌소? 울고 있는 것을 보니 설마 선생의 아이는 아니겠…"
 "미쳤습네까!?"

 계속 그의 시선을 피하던 설참이 바로 김원을 쳐다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김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얼굴 제대로 보는구만."
 "…얼굴 보려고 그런 소리를 합네까?"
 "하하. 내가 농이 과했소. 사과 하지."
 
 김원이 그러더니 말했다.

 "혼인한 줄 몰랐소. 늦었지만 축하드리오."
 "……."

 김원 앞에서 설참은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대답은 차마 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김원이 설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설참은 대답을 못하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결국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아이의 아비 되는 이가… 헤렌스만 행성으로 간 뒤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헤렌스만? …아."

 김원은 헤렌스만 행성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괜한 걸 물었군. 미안하오."

 김원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을 만나러 왔지 않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설참이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기는데,

 "잠깐만."

 김원이 그녀는 붙잡더니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그래도 잘 드시오. 그대가 사랑하는 이가 남기고 간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오.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김원은 범백을 만나러 들어갔다.
 설참은 손을 펴서 김원이 자신의 손에 쥐어준 것을 봤다. 그건 구겨진 지폐였다.

 "……."

 설참은 김원에게 받은 지폐를 범백에게 받은 눈물 젖은 천조각에 싸서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었다.



 설참은 집에 도착하자 근래에 어디로 갔는지 모를 옥실이 남겨둔 식재료를 이용해 오랜만에 그녀 손으로 요리를 했다. 얼마 없는 식재료이지만 입에 풀칠할 만큼은 있었다. 

찰칵 

 설참은 언제나 듣던 구식 통신기기를 꺼버렸다. 그리고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쿵-

 마타마이니 행성과 먼 우주의 행성.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다 빠진 자리에 마타마이니의 구레아로 돌아가는 항공선 한 대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이들이 문이 열리자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듯 급하기 승선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이 표 검사를 하며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쳤다. 

 "오랜만이야."

 한 승객이 승무원에게 표를 내밀자 승무원이 표를 검사하며 말했다. 그 말에 표의 주인이 고개를 그 승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승무원은 옥실이었다.

 "구레아에 도착 하면 표 뒷면에 적힌 곳으로 가."

 옥실이 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며칠이 흘렀다.
 옥실이 갖다 놓은 식재료가 떨어졌다. 설참은 조금 더 불러진 배를 쓰다듬으며 식재료를 사러 장을 보러 나갔다. 
 그런데 어쩐지 거리에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무슨 일입네까?"

 설참이 상복을 입은 이를 붙잡고 물었다.

 "범백 선생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국민장 행렬에 참여하러 가는 길입니다."
 "…네?"

 그 말은 들은 설참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 망연하게 되물었다. 그러더니,

털썩

 그 자리에서 실신해버렸다. 

  

 "어! 정신이 드시오?"

 주변에 많은 이들이 설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참은 남의 집에 누워 있었다.

 "…장례는 끝났습니까?"

 설참이 물었다.
 설참의 질문에 옆의 아줌마가 말했다.

 "아직 안 끝났으니 지금 가면 장례 행렬에 참여할 수 있을겝니다."
 "감사합니다."

 설참은 정신은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장례 행렬에 합류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많은 사람들이 곡소리를 부르짖었다.
 설참도 행렬에 참가했다. 그런데 근처에 있던 이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러게 말일세. 얼마 전에는 김원이 죽었으니."

 그 말에 설참은 고개를 홱 돌렸다.
 설참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자 대화 하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김원이 죽었다니 그게 무슨 말입네까?"

 설첨이 다급하게 물었다.

 "몰랐소? 범백 선생과 만난 이후에 저쪽에서 김원을 죽였잖소."
 "이쪽에서는 범백이 죽고 저쪽에서는 김원이 죽고."

 설참은 땅에 꽂힌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멈춰버렸다. 

 "하…하하……."

 설참이 별안간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장례식에 웬 미친년이야?"

 지나가는 이들이 설참이 실성한 듯 웃자 행렬에서 쫓아냈다. 설참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하하… 흐흐…흐흐흐…흐흐흑……."

 웃음 소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어 갔다.

 "저게 뭐시여!?"

 지나가는 이들이 기겁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만 거리에 흘리며 걷는 것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 핏자국이 남겨지고 있었다.



 제법 시원해진 밤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에 따라 나뭇잎이 부딪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에는 두꺼운 줄이 나뭇잎과 함께 부딪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나무 아래에는 빈 무덤과, 방금 생긴 작은 진짜 무덤이 하나 있었다.

 설참은 비어버린 자신의 무덤처럼 이젠 비어버린 자신의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방금 묻은 작은 둔덕은 한 번 바라봤다. 작은 둔덕 옆에는 피가 잔뜩 묻은 칼이 하나 꽂혀 있었다. 크고 작은 둔덕들 앞에는 한 때 붉었던 바스라질 만큼 마른 꽃, 시계, 축축했던 천 조각, 구겨진 지폐가 놓여있었다.

 나무 아래 비어있는 큰 무덤 위로 설참이 천천히 올라섰다. 설참은 칼자국을 따라 아직도 핏자국이 선명한 손목 위로 달린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힘을 짜내 끈을 잡았다. 설참은 나무에 매달린 두꺼운 끈으로 만들어진 고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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