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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헤렌스만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헤렌스만

SooyangLim 2021. 10. 11. 19:02

 "…우주 9구역의 전쟁 범죄에 대항한 우주 연합은, 지난 26일, 마타마이니 행성과 우리 구레아의 독립이 포함 된 조항이 있는 페츠다 선언을 발표했었습니다."

 설참의 머리 맡에 놓인 아주 오래된 구식 통신 기기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우주 9구역의 항복을 촉구 하는 페츠다 선언에 대해, 며칠 전 우주 9구역은 '선언에 대해 당국은 중요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전쟁을 지속할 노력을 할 뿐이다' 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우주 9구역의 핵심 사령관들 중 하나가 자살하고, 패전이 거의 확실해진 마당에 나온 발표였다.

 썩 달갑지 않은 라디오 소리에 설참이 부스스 눈을 떴다. 항상 옆에서 늦게까지 자던 장신의 남자는 어쩐지 오늘따라 자리에 없었다.
 설참은 옷을 적당히 걸쳐 입고 나가보려는데 문이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어? 깼어?"

 그는 설참에서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씻고 나갈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아, 오늘 엄청 덥네. 씻었는데 금방 다시 땀 나."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들이 설참의 예전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벌써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설참이 물었다.

 "어디 가느냐?"
 "왕자님한테 갔다 온다고 했었는데, 기억 나? 오늘 쯤에 옥실이가 오기로 했어."
 "그래? 그럼 나도 준비해야겠구나."
 "지난에 가야 되지?"

 설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신의 남자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설참은 그런 그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다.

 "왜 그러느냐?"
 "…아냐. 준비 해. 곧 옥실이 올 것 같으니까. 날씨 더우니까 시원하게 입어."

 그러나 곧 온다는 말과 달리 옥실이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와? 너무 늦잖아!"

 장신의 남자가 짜증을 냈다.

 "회복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티켓도 구하기 힘들었구요."

 옥실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티켓은?"
 "여기요."
 
 장신의 남자는 뺏듯 급히 티켓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달려 나가려는데,

 "화장실 갔다 가는 게 어때요?"

 옥실이 말했다.

 "아, 그럴까?"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 안에 있던 설참이 나왔다.

 "왔구나. 이제 떠나야 하니 잠시 집 정리 좀 도와주지 않겠느냐?" 

 설참이 마당에 있는 옥실에게 말했다. 옥실은 설참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서 치울 물건들을 들고 나오며 장신의 남자에게 소리쳤다.

 "잠깐 이거 치우는 거 돕고 가요! 어차피 시간 좀 남았으니까!"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옥실이 물건을 들고 나오며 화장실 문을 발로 쾅 찼다.

끼이익-

 문이 힘 없이 그냥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옥실은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자 당황했다. 옥실은 눈을 깜빡이더니 중얼거렸다.

 "…마당에 있나?"

 옥실이 마당에 나가니, 설참이 흔적을 없애기 위해 태울 물건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마당에도 장신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설참이 옥실이 가져온 물건을 건네받아 태울 곳에 놓으며 말했다.

 "그건 여기 놓으면 된…"
 "어디 갔어요? 혹시 나갔어요?"

 옥실은 설마 하는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고 설참의 말을 자르며 확인 차 물어봤다.

 "응? 아, 응. 좀 전에 나갔다."

 설참이 대답 했다.
 그 말에 옥실은 머리가 과부하로 터질 것 같았다. 동시에 옥실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 장신의 남자는 이곳에 없는데 왜 아직 여기에 있다고 착각했을까?

 옥실은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설참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시계 가지고 있어요?"
 "시계?"
 "혹시 시계 주지 않았어요?"

 옥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재차 물었다.

 '일단 구라 쳐. 잡아 떼. 그리고 들키면, 내가 잘 봐달라고 했다고 말해.'

 장신의 남자가 설참에게 한 말이었다.
 설참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옥실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갖고 계시잖아요? 지금 주머니에." 

 어쩔 수 없이 설참이 주머니에서 시계를 천천히 꺼내며 말했다.

 "…잘 봐달라고 전해달라고 했어."
 "하하. 잘 봐달라고 했어요? 하하하."
 
 옥실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지었다.

 "엿 먹여 놓고는 그런 말을 해요? 짜증 나게 머리 굴리셨네."
 
 예상치 못한 옥실이의 반응에 설참은 당황해서 시계를 돌려줘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받은 물건이라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설참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옥실에게 말했다.

 "시계가 많이 중요한 물건인가 보구나."
 "보통 물건은 아니죠. 그쪽이 가지고 있으면 안 될 물건이기도 하고요."

 옥실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에 설참은 옥실에게 줘야 하나 싶어서 망설이다가 결국 옥실이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 하며 이걸 줬다."
 "그렇게 말해요? 하. 누구 맘대로."

 옥실이 짜증을 내며 시계를 잡는 순간,

 "어?"

 옥실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설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갑자기 설참을 위아래로 쳐다봤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몇 번이나 설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옥실의 행동에 설참이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옥실은 뭔가를 깨달은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순간 인상을 팍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섬뜩할 정도로 갑자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옥실은 시계를 내민 설참의 손을 다시 접어서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랑의 증표로 드린 물건을 제가 어떻게 다시 뺏을 수 있겠나요?"

 갑자기 변한 옥실의 모습과, 기시감이 드는 말에 설참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아니다. 중요한 물건 같으니 돌려주겠다."
 "에이. 중요한 건 맞지만, 이렇게 제가 뺏듯이 받는 건 좀 아니죠."
 "……."
 "아, 그럼 나중에 만나면 애인한테 직접 돌려드리는 게 어떨까요?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면서요?"
 "……."
 "그때 뭐 반지 같은 거 맞추던가 그런 건 어때요? 그건 돌려드리고요."

 옥실의 말에 설참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로 들어가셔야 되죠? 구레아 탈환 작전 하러 가야 되잖아요. 가기 전에 잠시 옥이 집에 들르는 건 어때요? 정리 좀 하게요."

 옥실의 말에 설참은 아까의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기시감은 자신이 하지도 않을 말과 일들을 옥실이 알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안 것이냐?"

 설참이 옥실에게 물었다.

 "제가 정보가 빠삭하거든요."

 옥실은 그렇게 말하며 집 안에서 아까 설참이 아침에 듣고 있던 구식 통신 기기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태울 물건을 다 태운 뒤에, 옥실이가 낸 돈으로 택시를 타고 옥이의 집으로 갔다. 
 
 설참은 가는 동안 계속 경계하는 눈빛으로 옥실을 바라봤다.
 옥실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설참은 그 미소가 소름 끼치는 미소라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려 옥이의 집에 도착했다.
 설참이 자신을 의심하거나 말거나,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거나 말거나, 옥실은 능청스럽게 설참에게 말을 붙였다.

 "아참. 오늘 어디 가셨는지는 들었나요?"

 옥실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며 설참에게 말했다.
 설참은 대답을 해야 할 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뭔들 다 아는 놈에게 숨겨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 생각에 주저하면서도 대답했다.
  
 "…왕자님께 간다고 들었다."  
 "네. 지금 왕자님이 9구역의 헤렌스만 행성에 계셔서 헤렌스만 행성으로 갔어요. 헤렌스만 행성으로 간 거 알고 계셨죠?"
 
 옥실은 무서울 정도로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옥실은 자신의 손에 들린, 아까 설참의 옛집에서 가져 나온 오래된 구식 통신 장비를 설참에게 건네며 말했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니, 얘는 왜 이렇게 늦어가지고!"

 장신의 남자는 설참이 예전에 살던 화장실에서 나온 뒤 바로 택시를 탔다. 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9구역으로 가는 비행체를 타기 위한 승강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요!"

 장신의 남자는 뛰어서인지 숨을 몰아쉬며 티켓을 내밀었다.

 "…고객님. 이건 다음 함선의 티켓인데요?"
 "어? 다음 거라고?"

 장신의 남자가 그제서야 티켓을 제대로 살펴봤다. 원래 타고 가기로 했던 항공 기체 티켓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장신의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짜증 냈다.

 "늦는 거 아냐, 이거!?"

 그는 대기실 의자로 걸어가며 다음 항공 기체 시간을 확인했다.

 "아, 다행히 곧 도착하네."

 장신의 남자는 잠깐 기다리고는 다음 항공 기체를 탔다. 그리고 9구역으로 가는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항공 기체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게이트 통과 전,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수면 가스가 살포됩니다."
 
 방송 소리가 들리고, 장신의 남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타마이니 아즈국 영해의 상공 위 군사 게이트 앞-

 방금 연 게이트 앞에 거대한 함선에 떠있었다.
 함선 안에는 우주 각 지역의 지도자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권을 가진 아즈국의 지도자가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민간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민간인들에세는 이미 고지했습니다. 그리고 페츠다 선언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습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안 됩니다."  

 피해가 극심한 여러 우주 구역 은하의 지도자들이 말했다. 다른 우주의 지도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말 없이 있던 아즈국의 지도자가, 마침내 장고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닐라 가이 함선 준비됐습니다."

 보고가 들어왔다. 게이트 앞에 있는 작은 함선의 이름은 아닐라 가이였다. 그 함선에는 지금껏 전 주우에 드러난 적이 없는 무기가 들어있었다.

 "개방합니다."

 아닐라 가이의 문이 열리고 포가 하나 드러났다.
 포가 게이트 중앙을 향해 정조준했다.

 이 게이트는 우주 9구역 헤란스만 행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주 9구역, 헤란스만 행성-

 그맘때쯤 왕자는 구레아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는 헤란스만 행성에 강제로 배치된 상태였다. 왕자는 오늘 장신의 남자가 그를 데려오겠다는 말을 생각하며 언제쯤 올 지 생각했다.

 '저녁 때 쯤 오겠지? 아직까지 헤렌스만은 공격 받은 적이 없지만… 혹시나 공습이 있으면 위험할 텐데.'

 왕자는 장신의 남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출근을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그 날, 헤렌스만 행성은 아침 햇살은 아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3,2,1…

 아닐라 가이 함선에 달린 포에서 가늘고 길게 뻗은 일직선의 빛이, 마치 주사기의 바늘처럼 하늘 위에 열린 게이트에 꽂혔다. 빛은 게이트를 통과해 헤렌스만의 상공 위에서 행성으로 꽂혔다. 

 헤렌스만 행성, 마타마이니에서 쏘아 올린 빛이 닿은 곳과는 거리가 있는 행성의 다른 부분,

우르릉

 이곳에 사는 헤렌스만 행성의 생명체들은 갑자기 들은 이상하고 거대한 굉음을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행성 속에서부터 나는 듯 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 소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상한 소리와 함께 헤렌스만 행성은 마치 중력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울렁이기 시작했다. 헤렌스만 행성은 빛에 닿은 부분부터 시작해서, 행성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행성 바닥에서 빛과, 높은 열이 치솟았다. 헤렌스만 행성은 마치 항성이 되려는 것처럼 갈라진 틈 사이로 빛과 열이 튀어나왔다. 헤렌스만 행성 위의 모든 것들이 열로 인해 사라지거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우주 공간을 향해 튕겨져 나가듯 붕 떴다. 



 "관측 사진입니다."
 
 마타마이니 상공 위의 함선에서, 우주 각 지역의 지도자들이 보고로 올라 온 사진을 건네받았다.

 그 사진에는 그들이 익히 알 던 헤렌스만 행성은 없었다. 그저 우주 공간에 크고 작은 산산조각 난 파편 이 있는 사진이었다. 마치 쿠키를 진공에서 부숴 버린 것 같은 모양이었다. 
 헤렌스만 행성은 그야말로 완전히 터져버렸다.



마타마이니 행성력 4278년 
우주 9구역 중심 은하단의 헤렌스만 행성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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