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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재회 본문

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1부. 노인의 일기 - 재회

SooyangLim 2021. 8. 19. 19:02

 "어디 가십니까?"

 여러모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탓에 오는 동안 말도 안 하고 삐져있던 장신의 남자는 나즈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구레아로 가려했다.

 "구레아에 가 봤자 시종은 못 찾을겁니다."
 "뭐?"
 "나즈에서 보자고 했으니까요."
 "하……."

 장신의 남자는 옥실이가 이곳에 있다는 말에 그냥 한숨만 쉬었다.

 "…좋아. 니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다 해. 자,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데?"
 
 홍화가 장신의 남자의 질문에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구레아 임시정부로 갈 겁니다."
 "임시 정부!"
 
 임시 정부라는 말에 장신의 남자의 눈이 커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얼마 뒤에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거든요. 아마 주요 인사들이 다 모일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장신의 남자가 시계를 열어 날짜를 확인 했다. 벌써 마타마이니력의 해가 넘어가 있었다. 왔다 갔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이, 시일은 벌써 마타마이니력 4267년 1월이었다.
 홍화가 시계를 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를 재촉하면서도 은밀하게 말했다.

 "이번에 전달 할 내용이 많습니다. 왕자님의 부탁도 들어 드려야 하니 지금이 아주 적기입니다.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둘은 나즈에 조착해서도 9구역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신분을 몇 번이나 바꾸고, 동선도 주의하고, 시간대도 신경을 써서 이동했다. 때문에 구레아의 임시정부까지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왜냐하면 비교적 우주 9구역의 영향력이 덜 하다는 나즈에서조차, 스파이들이 활약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서오시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범백을 만났다.

 "어휴……. 여기까지 오는데 왜 이리 귀찮은 일이 많은지……."

 장신의 남자가 인사도 하기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소연을 했다.
 
 "잘 도착 했으니 다행 아닙니까?"

 홍화가 말했다.
 그 때 이곳에 미리 와 있던 옥실이 장신의 남자에게 다가왔다.

 "오셨어요?"
 "방금 막 도착했어. 하, 힘들었다."
 "고생하셨어요."

 옥실이 혼자 오는 것을 본 홍화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언니는?"
 "아 그 분은……."

 옥실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나즈에 도착은 같이 했는데… 다시 군대로 들어가셨…어요……."
 "…그렇구나. 그래……. 그랬겠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떠나버린 설참의 소식이 홍화는 체념한 듯 말했다.
 범백이 홍화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자자, 일단 짐을 풀고 와서 쉬고 얘기를 듣겠네. 저 방으로 가면 된다네."
 
 홍화는 짐을 풀어놓을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옥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언니가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
 "김원에게 간다 했습니다."
 "김원! 김원의 군대에 들어갔다니…!"

 홍화가 영 탐탁찮아 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옥실에게 물었다.

 "김원을 안 좋아하는 것 같네?"
 "아무래도요."
 "왜?"
 "몇 가지 이유가 있죠. 일단 기본적으로 홍화나 범백이랑 사상적으로 다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고……."

 옥실이 뒷 말을 흐렸다.

 "하하, 그 놈의 사상……."

 장신의 남자는 옥실의 말에 비꼬듯이 말했다.
 옥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주인님은 항상 재밌는 구경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제가 보기엔 다 부질없어 보여요."
 "그렇게 말했어? 오히려 그쪽이 부질없다고 말 할 줄 알았는데."

 장신의 남자가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놀란듯 말했다.
 옥실은 장신의 남자의 짐을 정리 해주며 말했다.

 "그런 거 보러 다니시는 분인데요, 뭘."
 "대단하네. 자기들 일이면 못 그럴텐데."
 "주변분들 일도 재밌어 하시던데요?"
 "…그건 좀 심각한 문제 아니냐?"
 "그거야 모르죠. 저 같은 한 낱 미물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분들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저로서는 알 턱이 없으니까요."

 옥실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을 닫았다.

 "빨리 돌아갈 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건 나도 그래. 너 언제 괜찮아지냐?"

 장신의 남자의 물음에 옥실은 잠시 가만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중간중간 시도는 해보겠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얼마나?"
 "일단 왕자님 일은 해결해 드리는 동안은 계속 시도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옥실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옥실은 장신의 남자의 반응에 우울하게 말했다.

 "저도 지금 당황스럽네요."



 "누가 왔다고?"

 옥실이 당황하고 있을 때쯤, 설참은 김원의 군대에 합류했다. 늦은 저녁, 김원은 식사 자리에서 막 설참이 합류했다는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설참은 식사 중인 김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누구…?"
 "위장을 하고 와서 못 알아보는 것인가."

 설참은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억 못 할 만 하지. 무관 학교에서 봤으니. 10여 년이 훌쭉 넘었으니."
 "무관학교?"

 김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난 거기서 얼마 있지 않고 나왔소만.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그 쯤에 나왔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이 없소만."
 "당신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난 여름이 되기 전에 홍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나왔었지."

 김원은 기억을 더듬었다.

 "홍 장군?"

 그 사이 설참은 얼굴을 뒤덮은 위장을 천으로 문질러 지웠다.  
 김원은 설참이 위장을 다 지우고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설참을 기억해냈다.

 "당신이었군! 반갑소!"
 
 김원이 설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설참도 흔쾌히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네다."
 "이 얼마만이오? 벌써 십 년이 더 되었다니.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식사합시다."

 저녁 식사 후, 김원과 설참은 따로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김원이 머무르는 곳으로 갔다.
 김원은 자리에 앉아 설참에게 물었다. 

 "그간 어찌 지냈나?"
 "바빴습네다. 전쟁터를 오가고 있었으니."
 "살아 있을 줄은 몰랐소."

 김원은 차를 한 잔 타주며 말했다. 
 설참은 컵을 받아 들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입네다."

 그 말에 김원은 의아한 듯 말했다.

 "왜 그리 말하시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이오?"
 "해방을 보지도 못했고, 9구역에 목숨 바쳐 싸우지도 못했으니까……. 그 어떠한 목적도 이루지 못한 채 숨이 붙어 있는 채 부상만 늘어가는 이 몸뚱이가 그저 부끄럽습네다."

 설참의 말에 김원은 눈이 커졌다가 피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설참을 보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일리 있군."
 "여전하십네다."
 "뭐가 말이오?"
 "그 말버릇 말입네다."

 설참의 말에 김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말버릇?"
 "무슨 말만 하면 일리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던가?"
 "그 때도 그랬습니다."
 "그대가 일리 있는 말을 많이 하는 모양이오."

 그 말에 설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한 쪽 눈을 가릴 만큼 길어진 앞머리를 넘기고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김원은 설참의 앞머리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머리가 길면 조준이 잘 되오?" 
 "내 실력이 의심스럽다면 지금 당장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하! 됐소. 또 단추 하나 잃기는 싫으니."

 김원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설참은 앞머리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그대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긴 것 같긴 합니다. 눈이 자꾸 찔리긴 합니다. 혹시 가위와 거울 같은 것 있습네까?"

 그 말에 김원은 폭탄 설계를 위해 서류를 잔뜩 쌓아둔 곳 옆에 있는 필통을 뒤적거렸다.

 "거울 같은 것은 없소." 
 "가위만 있어도 됩니다. 그냥 잘라도 될 것 같소."

 김원은 가위를 가져오며 말했다.

 "아니오. 거울은 없지만 내가 잘라 드리리다."
 "뭐? 아니, 아닙니다! 됐습니다! 일없습네다!"
 
 설참이 당황하며 손사레를 쳤다.
 김원이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잘라야 될 것 아니오? 총 쏘려면 눈을 찌르게 놔두는 것보다 지금 자르는 게 좋지 않겠소?"

 김원이 설참의 손에서 컵을 빼내 옆에 놔두고는 바짝 마주 앉았다.

 "아니, 진짜 나는……."
 "눈 감으시오."

 설참이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벗고 한쪽이 긴 머리의 이마 쪽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눈을 안 찌를 만큼만 잘라주면 됩니다."

 김원이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 손 떼는 게 어떻겠소?"
 
 하지만 설참이 손을 떼지 않자 김원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머리카락에 가위를 댔다.

사각 사각

 침묵 속에서 짧은 머리카락 조각이 잘려나갔다.

 김원은 설참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누르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삐뚤삐뚤 제대로 잘리지도 않는 데다가 그녀의 속눈썹이나 피부, 혹은 눈을 찌를까 봐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덕분에 김원의 호흡이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닿았다.

 "안되겠소."



 김원은 결국 그녀의 손을 잡고 치웠다.

 "아니……."
 "가위로 찌를 것 같소."
 
 설참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김원은 그리 말했다.

 김원은 곧이어 왜 그녀가 필사적으로 그 부분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린 부분에는 화상인지 상처인지 모를 흉터가 있었다.
 김원은 그 상처에 대해 한 마디 말 없이 머리를 자르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진 잘린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조각이 얼굴에 떨어졌으니 좀 있다가 씻어야겠소."
 "알겠습네다."

 김원은 문득, 그리 말하는 그녀의 입술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이전보다 약간 더 붉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에 무관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뭘 했소?"
 "그게 왜 궁금합니까."
 "그냥. 신기해서 말이오. 그 때는 분 냄새가 그리도 진하게 났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나지 않으니 말이오."
 "칭찬으로 듣겠습네다."
 "아깝지 않소?"
 
 김원은 삐뚤삐뚤한 부분들을 다듬으며 말했다.

 "마타마이니와 해방을 위하는 입장에서야 그대 같은 이를 얻은 것은 행운이지만, 그대의 입장에서는 아까울 것 같소이다.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것 아니오?"
 "나에게 자랑스럽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나라면 아까울 것 같소."

 김원이 자른 머리의 길이가 맞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내 여자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가 군인이 되기 전에는 주변에서 출중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건 칭찬으로 듣지 않겠습네다."
 "칭찬이오."

 가위질 소리가 멈췄다.

 "눈 떠보시오. 눈에 찔리지 않게 제대로 잘랐는지 봐야 되니."

 설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김원이 설참의 코 앞에서 눈 위까지 잘린 머리카락 길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 안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김원이 가위를 옆에 내려놨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김원은 설참의 얼굴에 묻은 잘린 머리카락을 떼어내려는 듯 손으로 쓸어내리듯 만졌다. 김원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콧잔등, 볼, 그리고 입술을 타고 내려왔다. 아무리 관리가 안 되었다 한들, 그녀의 얇은 피부와 자칫하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입술의 감촉이 손 끝에 전해졌다.  
 
 이제 그 감촉은 서로의 입술에 닿아있었다. 이제는 둘은 말 없는 침묵 속, 소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 소란스러운 침묵을 깬 건 김원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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