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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Novel)/캣츠비안나이트

2부. 기형 - 출사표

SooyangLim 2022. 8. 1. 19:02

 "재시작이라니?"

 

 지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 말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이는 건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손에 든 것을 다 내려다 놓고 내게 물었다.

 

 "뭘?"
 "말 그대로죠. 어디든 다 썩어있다면, 전부 다 엎는 게 맞지 않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네. 무서운 말도 하고 있고."

 지환의 말에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제 생각이나 말이 무섭다고 생각하세요? 무서운 행동을 봤잖아요."
 "……."
 "사람을 죽이는 걸 본 마당에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 없는거 아닌가요?"
 "지금 행동으로 옮기고 있잖아. 그게 네 뜻 아냐?"

 지환은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지환은 나를 떠보려는 듯했다.

 "네 생각이 여럿을 더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 말에 나는 행동을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건 지킬 능력이 없을 때나 하는 말이죠."
 "…자신만만하네."

덜컹

 "뭐, 뭐야?"

 건물이 흔들리자 현사월이 비틀거리며 말했다. 카페 사장은 총을 잠시 거둬들이고,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귀 막고 눈 감아요."

 다들 내 말을 듣고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아도 소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동시에 밖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카페 사장이 밖을 바라 봤다가 경악에 물든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한 거지?"

 지환이 밖을 보며 물었다.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몸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말에 내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 질문보다는 이게 말이 되는지, 어떻게 우리가 무사한 지를 물었어야죠." 

 밖은 캄캄했다. 창문 밖으로 둥글고 푸른 거대한 구체가 보였다. 그것은  방금 전 우리가 발을 딛고 있던 행성이었다.

 "어때요?"

 내 물음에 그는 날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렇게 말 하고 그는 내가 내려놓은 묵직한 가방을 가볍게 들었다. 안에 있던 수많은 종이뭉치가 낮아진 중력 탓에, 마치 처음부터 그의 것이라는 듯 가볍게 들렸다.



 "…힐러 역할이라도 맡길 셈인가요?"

 주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힐러는 무슨. 이게 게임도 아니고."

 지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현은 골치 아프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가, 턱을 괴는 자세로 바꾸며 말했다.

 "간만에 쉬는 날이었는데 이런 무거운 얘기나 하려고 불러내다니. 게다가 당신이 이런 일에 가담을 할 줄이야." 
 "직접보니 승산이 있겠더라고."

 지환이 국밥집에서 주현의 술잔에 소주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설득하면 조금이라도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 당신은…"
 "의사라서?"

 주현이 소주를 한 번에 쭉 들이키고는 말했다.
 지환이 담담하게 말했다.

 "보고 들은 것도, 겪은 것도 많으니까."
 "칭찬으로 들을게요."  
 "당신은 인생의 밑바닥부터 위쪽까지 다 봤다는 뜻도 되고."
 "그것도 칭찬으로 들을게요."

 주현이 그렇게 말하며 지환의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라줬다. 그리고 주현은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부으며 말했다.

 "당신이 한 말대로면 내겐 잃을 게 많다는 의미인 건 알죠?"
 
 지환은 주현의 말 뒤에 담긴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날 설득해봐라.'

 라는 뜻이었다. 지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말이야. 하마터면 오늘 불려가서 말이지."

 그 말에 주현이 물었다.

 "누구한테 불려갔는데요?"
 "어르신."



 지환에게 내민 돈뭉치의 주인이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몇 분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의 집, 그의 저택은 고상한 한옥과 현대식 생활 양식이 적절히 어우러진 집이었다. 무슨 공원만큼 넓은 마당에는 소나무와 폭포를 본 딴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 사랑방에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와 비단 금침이 있었다. 어르신은 금침 위에 앉아서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그의 뒤에 놓인 비단실로 수놓아진 병풍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병풍은 특이하게도 아홉 폭으로, 오묘한 색깔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각 폭에는 각자 사람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는데, 여자 여덟과 남자 하나였다.

 "뒤의 병풍과 이 다기들은 수장이 나한테 선물해 준 것이라네."

 갑자기 건물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관에는 나무와 개미, 그리고 한 남자가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찻잔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

 난 건물주의 말에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그가 앞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는 점과, 수장이 선물해줬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본부와 이어지는 문을 만들 때 장소 몇 곳을 제공해준 답례로 받았지."
 "…그렇군요."
 "수장은 내게 선물해주면서 언젠가 선물들에 관한 대화를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했었지. 그날이 오늘인지도 모르겠군."
 "……."
 "병풍 안의 인물들은 팔선녀와 성진이라네. 들어본 적이 있는 지 모르겠군."
 "성진…?"

 내가 중얼거리는데, 그가 내가 보이는 것처럼 선글라스 낀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가끔 궁금한 적 없었나?"
 "네?"
 "내가 어떻게 그런 자산이 있는지."

 난 그의 말에 자랑 타임의 시작인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랑할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네."

 난 그 말에 또 놀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
 "난 과거에 사업을 했다네. 그리고 남들과는 좀 다른 재능이 있었지."

 그가 다시 다관으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사업을 하기에 유리한 능력. 뭘 것 같은가?"
 "…돈을 잘 세는 능력…?"

 난 대충 때려 찍으며 말했다.

 "그것도 좋은 재능 중의 한 가지이긴 하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자네는 분명히 나한테 위화감을 느꼈을 테니."
 "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놨다.

 "나는 눈은 안 보이지만, 생각을 읽고 들을 수 있다네. 그러니 뭘 원하는 지 훤히 알 수 있지."

 그 말에 난 머리가 멍해졌다. 보이지 않는데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말이 돼?

 "자네가 가진 능력은 말이 되는 능력이라 생각하나?"
 "…아."
 "한 가지 더."
 
 그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헉."

 나는 그의 모습에 순간 숨을 멈췄다.

 "수장이 내게 선물을 준 두번째 이유가 있다네."

 그의 눈은 흰자가 없이 새까맸다.

 "내 딸이 수장 밑에서 문지기로 일하고 있다네."
 
 난 본부에 갈 때 봤었던 문지기가 생각났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떠올랐다. 

 "맞아. 그 아이가 내 딸이라네. 나는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내 딸은 멀리 있는 것도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어디든지 상관없이 말일세."
 "네…?"
 "그러니 우리의 대화도, 자네의 행동도, 수장이 원한다면 모두 다 알 수가 있다네."

 난 그 말을 들으니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지금까지 일들은 모두…? 아니, 그럼 지금 이 대화도 알고 있다는 그런…?"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네."

 건물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건물주는 내 표정을 보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네?"
 "자네의 지금 생각과 행동이 수장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가?"
 "…아저씨들을 죽이고 그런 것들도 전부 다요? 아니, 어쩌면 저를 데려오는 것부터 전부다 수장의 계획이라는 말인가요?"
 "글쎄. 수장의 계획이라……."

 건물주는 다시 선글라스를 끼며 말했다.

 "저 병풍과 다기를 내게 줬던 순간부터 의도한 것은 맞을 것 같다네. 하지만,"

 그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수장의 계획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한다네."
 "이게 전부 그 여자가 계획한 게 아니라고요? 왜죠?"

 내 물음에 그는 갑자기 빙긋이 미소짓더니 말했다.

 "자네도 사과의 주인이니까."
 "…네?"
 "지금 몇 시인가?"

 난 갑자기 시간을 묻는 그의 말에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고 말했다.

 "3시 56분이요."
 "그렇군. 자네는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 거지?"
 "…네."
 "밖에 있는 아이들한테 들어오라고 하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긴 복도 끝에 다다르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창호지를 통해서 미색의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현사월만이 서있었다.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어, 그런데……." 
 "왜?"
 "아이'들'한테 들어오라고 하셨었는데……."
 "우리 둘 밖에 안 왔었잖아? 집안일 하시는 분들더러 아이들이라고 하시진 않았는데……."
 
 현사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누가 더 온 줄 알았어요."
 


 "…간부들을 모두 부르고 떠나도록."
 
 수장이 말했다.
 수장 앞의 그녀는, 아버지처럼 흰자위가 없이 눈이 새까만 여자였다. 그녀는 건물주의 딸이자 본부의 문지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수장에게 고개를 숙여 명대로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리고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촤르륵

 그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그녀의 손에 달린 둥근 것에 달린 줄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은 시계였다. 3시 56분을 가리키는 회중시계.

 건물주의 딸이 시계줄을 잡고 본부의 긴 카페트를 따라 걸어 나왔다. 그녀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그녀의 회중시계가 괘종시계의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시계가 한 번씩 흔들릴 때마다 긴 카펫 양 옆에는 간부들이 한 명씩 나타났다. 간부들은 나타나는 순서대로 고개를 숙였다.

또각또각또각



 건물주의 딸이 문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아주 많은, 108명의, 모든 간부들이 다 도착해있었다. 그들은 길고 여러가지 색이 어지러이 섞인 카펫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있었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녀는 문을 열고는 뒤돌았다. 그리고 수장에게 정중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 닫고 나갔다.



 "왔느냐."

 문지기가 건물주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문을 열어뒀습니다."
 "그렇구나."
 "필요한 것은 전해주셨습니까?"
 "사월이에게 전했다."
 
 그녀는 건물주의 앞에 앉으며 물었다.

 "도울 이들은요?"
 "준비 되었을 것이다."



 "어때?"
 
 대화를 끝낸 지환이 물었다.

 "…나쁘지 않네요. 계획은 그럴듯해요."

 주현이 말했다.

 "솔찍히,"

 주현이 남은 술을 마저 쭉 들이키고는 말했다.

 "맘에 드네요."

 주현은 올리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그 파괴적인 능력도요."
 "파괴적이다라……. 지키기에는 딱 좋은 능력이지. 이번에는 지키는 데만 쓰이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겠죠."
 "그럼 동의인가."
 "……."

 주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네."

 주현의 대답에 지환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갈 채비를 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가자고. 술도 한 잔 마셨으니 거사를 치르기 딱 좋은 날이야."
 "…네? 그게 무슨……."
 "일어나. 동의 했으니 가야지."
 "어딜요?"
 "어디긴. 본부."

 그 말에 주현이 뜨악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지금요? 이렇게 급하게요?"
 "네가 마지막이야. 꽤 많은 이들이 그 아이의 의견을 좋게 받아들였거든."
 "…네?"

 지환이 일어나서 국밥집의 문을 열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수많은 인파가 문 앞에 그들을 기다리고 서있었다. 다들 지환이 만든 저마다의 무기나 장비를 들고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환과 주현을 기다리며 그 인파의 맨 앞에 서서 말했다.

 "가죠."

 주현은 그런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준비 안됐어요?"
 
 지환이 내 옆에 있던 사람 키만한 거대한 가방을 들고 와서 주현에게 건넸다.

 "이거면 되지?"
 
 주현은 얼떨떨하게 그 가방을 열어보고는 나지막히 탄성을 질렀다.

 "…제대로 준비했네."
 "됐죠?"

 내 말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보자고."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우리는 본부 앞의 광장을 새까맣게 메웠다.
 난 닫혀있는 본부의 문 앞에서 말했다.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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