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9구역 전체 통합 사령관이 우주 9구역 주민들에게 전파되는 방송되는 기구 앞에 섰다. 그는 우주 역사에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하지만 그래서 길이 남아버린 미친 연설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 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분, 살아남은 두 자릿수 이하 구역 외 외계 종족은 차마 말할 것 없이 야만적이고 미개한 쓰레기 종족입니다. 세 자릿수 구역 이하는 취급할 수 조차 없는 외계 종족들입니다. 그 이상 구역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은 입에 담기도 싫은 종족입니다."
집 마루에 앉아 장신의 남자와 옥실이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 집은 도망 가서 새로 자리 잡은 집이었다.
"이걸 실시간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이야."
장신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연설 소리가 그들의 귀에 계속 들려왔다.
"우리는 우주 그 어느 종족보다 우수합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강하고 선진적이며 진보된 종족입니다. 유전자부터 우월한 종족입니다. 우리 9구역, 즉 찢어진 우주 사태로부터 살아남은 우리 한 자릿수 구역민인 우리 종족만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종족입니다."
우주 9구역 사령관의 연설을 들으며 장신의 남자가 말했다.
"이게 차이를 차별로 둔갑 시킨 그 연설이구만. 자기들 먹고 사는 문제를 덮어 씌워서 말이야."
"흔한 일이죠. 글자나 말만 바꿔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죠."
옥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겹네."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지들이 뭐라고."
"그렇게 말하시는 걸 들으니 재밌네요."
"아,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나?"
장신의 남자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옥실이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말했다.
"참 재밌지 않나요?"
"응?"
"마치 저들이 숭배 하는 이에게 비호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우월한 양 저런 얘길 하는 게요."
옥실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숭배하는 이에게 비호 받는다라……. 네가 그런 말 하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옥실이 연설 중에 찢어진 우주에 대한 언급이 들리자 피식 비웃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찢어진 우주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게 정말 뜬금없네요."
옥실이 말했다.
장신의 남자는 가만히 옥실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주인은 이거 듣고 뭐래?"
"주인님이요?"
사령관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울렸다.
"우리는 세계를 계몽을 시키고 현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 전진 할 것입니다. 이 세계를 얻을 수 있게 우리를 지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옥실이 연설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만나면 물어볼게요."
"대화 해 본 적 없나 보네."
"이 연설에 관해서는 없어요."
옥실은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가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들어가서 쉬어야 될 것 같아요."
그들의 귓가에 울리던 사령관의 연설이 뚝 끊겼다.
장신의 남자가 걱정스렁 표정으로 옥실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더 안좋아진 건 아니지?"
"자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긴 해요."
옥실은 얼마 전 기차에서 총격전 이후로 더 상태가 나빠졌다.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회복이 아예 안 되는 거야?"
"자가 회복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긴 한데……. 밑 빠진 독처럼 계속 새는 것 같아요."
옥실이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이렇게 숨어지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장신의 남자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듯 옥실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옥실이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홍화의 남편과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는 손에 꽃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어디 갔다 왔어?"
아저씨가 내게 미소 지으며 말했어요. 길가에 나무만치 큰 이 아저씨는 우리 집에 같이 살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 죽었습니다. 엄마 장례를 지내려 땅도 팔아버린 우리 아버지. 아픈 우리 아버지는 엄마가 죽고 날 키우러 젖동냥을 하며 키웠습니다.
엄마도 없고, 땅도 없고, 집에 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 아버지. 나 하나 밖에 안 남은 불쌍한 우리 아버지. 내가 잠들고 나면 머리를 쓸어주며 매일 내게 말씀하셨지요.
"옥이, 우리 이쁜 옥이."
아픈 아버지는 어느 날, 돈이 없으니 광산에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우리 아버지는 일을 못해 매일 맞다가 결국 버려졌지요. 나는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우리 아버지를 안고 울었습니다.
그 때,바닥에 흙먼지 뒤집어 쓴 아버지 앞에 매끈한 차 한 대가 섰습니다. 차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니 같은 마나님이 내렸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요? 마치 어두운 밤에 빛나는 저 푸른 위성 같았습니다. 나는 마나님을 보자 눈물이 멈추고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새까맣고 반짝이는 높은 구두가 보였습니다.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목이 보였습니다. 윤이 반질반질 나는 긴 옷이 몸의 곡선을 따라 휘감겨 있었습니다. 손에는 새까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빛에 따라 무늬가 화려하게 보이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윗가슴부터 목까지 감싼 그물 같은 옷감 뒤로는 빛나는 피부와 산처럼 솟은 불룩한 가슴이 보였습니다. 손가락과 목에는 번쩍이는 보석이 겹겹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어깨보다 넓은 챙 아래로 피보다도 새빨간 입술이 입꼬리를 따라 부드럽게 휘어져 반짝였습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꽃 향기 같기도 하면서도 머리가 아픈 향기로운 냄새가 마나님에게서 났습니다.
마치 화려한 꽃 같은 마나님은 흙먼지와 굳은 살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불쌍한 우리 아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어요.
"당신은 지금부터 날 사랑하는 걸로 해요. 그러면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과 딸이 밥 걱정할 일 없게 해줄게요."
그 날 이후로 마나님은 우리 어머니가 되어줬습니다.
"내 이름은 홍화란다."
아,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에게 집도 주고 돈도 주고 밥도 가져다줬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해야 한다며 자주 집에 오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줬습니다. 고마우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이따금씩 우리 집에 언니라고 하는 군복을 입은 사내 같은 아주머니를 데리고 왔어요. 그 여자는 자주 오진 않았지만, 올 때 마다 아픈 우리 아버지 보다 더 크게 앓은 채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 나을 때 쯤이면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동네 어귀의 나무만큼이나 키가 큰 아저씨와, 연한 눈색을 가진 오라버니도 집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같이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키 큰 아저씨와 오빠는 아름다운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못 차려서 안겨 들어온 엄마의 언니라는 이는 깨자마자 엄마가 죽은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우리는 처음 어머니를 보았던 그 차를 타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 예쁜 꽃이에요."
나는 아버지와 같이 집 근처의 산길을 걷다가 빨갛게 핀 꽃을 봤습니다.
"어머니 같구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꽃 보다 더 예뻐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 꽃을 꺾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꽃은 받아 들고는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다시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꽃을 꺾으면 못 써."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나무랐습니다.
나는 받아든 꽃을 바닥에 버렸습니다. 낙화하는 꽃들이 바람을 타고 핏방울처럼 천천히 흩뿌려졌습니다.
"그러지 마라."
아버지가 다시 꽃을 주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말했습니다.
"집에 있는 가져가서 선물로 주자."
그렇게 말하고는 아버지는 꽃을 곱게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가는 풀줄기로 묶어 꽃다발로 만들어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집에 가는 길에 물었습니다.
"아버지."
"응?"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
아버지는 가만히 말 없이 걷다가 말했습니다.
"네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의 이름을 붙여 보는 게 어떨까?"
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집 문간에 들어섰습니다.
마루에 키 큰 아저씨가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아저씨!"
"어디 갔다 왔어?"
나는 아저씨에게 다가가며 말했습니다.
"요기 앞에 산에요."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몸 좀 괜찮아?"
"잠깐 걷는 건 괜찮습니다. 시장하시죠? 밥 준비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저씨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고는 밥을 하러 부엌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아저씨 옆에 앉아 꽃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 꽃."
"예쁘네."
아저씨가 꽃을 받아들지는 않고 그저 보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방금 꽃에 붙인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름은 홍화에요."
"뭐?"
"꽃 이름이요."
"……."
"방금 제가 꽃에 이름 붙여줬어요."
아저씨는 말 없이 꽃을 바라봤습니다.
"…안에 갖다 줘. 옥실이 말고."
아저씨는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아주머니가 누워있었습니다. 오빠는 안 보이는 것을 보니 또 벽장 안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나 봅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아주머니는 천천히 눈을 뜨고 날 바라봤습니다.
나는 옆에 앉아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저씨가 전해주래요."
아주머니는 꽃다발을 바라봤습니다.
"꽃 이름은 홍화예요."
아주머니는 이불 안에서 천천히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잡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물끄러미 꽃을 바라봤습니다.
아주머니는 한참이나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전해줘서 고맙다."
아주머니는 꽃다발이 바르르 떨릴만큼 꼭 쥐고 있는 게 보였어요.
"옥아, 밥상 차리는 거 도와다오!"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부엌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아주머니는 그 꽃다발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꽃다발은 며칠이 지나자 다 말라버렸어요. 하지만 눈이 펑펑 오는 겨울이 되어도 그 말라버린 꽃다발은 아주머니의 옷가지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어요.
마타마이니 행성력 4273년-
한파가 약간 잦아들 무렵, 구레아 국민들은 작년부터 내려진 지령을 접수해야 되는 기간이 찾아왔다.
「성명을 우주 9구역식 성과 이름으로 바꿀 것」
우주 9구역으로의 병합과 일체화를 위해 내려진 지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