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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방향 전환 下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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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인의 일기 - 방향 전환 下

SooyangLim 2021. 8. 16. 19:02

 "천치인가."

 장신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는 와중에도 설참은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여자인 거 왜 말 안 했어!?"

 장신의 남자가 눈을 가리고 소리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몰랐으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는 거냐?"
 "당연히."
 "상관 좀 하라고!"

 장신의 남자가 소리치자 설참은 마지못해 말했다.

 "…알겠다. 상관 해주겠다. 그럼 지금까지 날 뭐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냥 애새끼."
 "…알 필요가 없었군."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이젠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몸에 박힌 총알을 뽑는 데만 집중했다.

 "윽."

 설참은 비명을 삼켰다.

 "…뭐, 뭐해?"

 장신의 남자가 설참이 고통을 참는 소리를 듣자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천천히 치웠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딸그락

 설참은 손에 힘이 빠져 피 묻은 핀셋을 놓아버렸다. 

데구르륵

 핀셋 끝에 총알이 뽑혀 굴러 나왔다. 

 "어? 야! 뭐, 뭐하는 거야?"
 
 장신의 남자가 그녀에게서 뽑혀 나온 피 묻은 총알을 보며 기겁하고 말했다.

 하지만 설참은 대꾸도 안 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구멍을 방금 벗겨낸 붕대로 꾹 눌러 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치료 키트로 구멍을 막고 상처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총알 뚫린 자리를 싸매는 거야?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거?"

 장신의 남자가 설참의 행동에 당황하며 말했다.

 "…조용히 좀……."

 설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상반신을 붕대로 옭아맸다.

 "너 더 이상 참전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장신의 남자가 설참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말했다.

 설참은 눈을 감고 옷을 다시 입으며 중얼거렸다.

 "가야 돼. 그럴려고 빼낸 거니까. 지금…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럴 때일수록 더 사기를…"
 "야야, 괜찮냐?"

 설참이 일어나려다가 휘청 쓰러질 뻔 했다. 장신의 남자가 붙잡았지만 설참이 손을 뿌리쳤다.

 "놔."
 "좀 쉬어. 지금 움직이는 건 무리라고."
 
 설참은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동안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이제 더 이상은 움직일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가야…해……."
 "이 상태로 어딜 가겠다고?"
 "가야…된다고."
 "휴……."

 장신의 남자는 설참이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는 일단 설참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럼 잠깐 기력 회복 할 때까지 얘기나 좀 하다 나가가는 게 어때?"
 "……."
 "내부 문제는 무슨 일이야? 해결 가능한 일인가?"
 
 장신의 남자의 물음에 설참은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우리 쪽 문제가 아니라서……."
 "우리 쪽 문제가 아니라니?"
 "이전에 내가 서신을… 보낸 것도 그 문제였다. 지난국 군대 안에서 문제가 생겼다."
 "…장군이라도 죽었나?"
 "아니. 내분이 생긴… 모양이다. 그들끼리도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뭐?"

 장신의 남자는 설참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넌 나와야지. 왜 그러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네?"
 "안에서 내분 생겼는데 전쟁을 이길리가 있냐? 내부에 적이 하나만 있어도 문제가 되는데 내분이 생겼는데? 그냥 발 빼. 다음을 생각하라고."

 장신의 남자의 말에 설참이 눈을 뜨고는 버럭 화를 냈다.

 "그게 할 소리네? 문제를 해결해야지 도망치라는 소리를 하고 있나?"
 "구레아 군대가 그쪽 문제를 해결 가능해?"
 "얘기는 해봐야지. 어떻게든 마음을 모아서……."
 "전쟁 중에 얘기를 해봐? 하……. 좋아. 그럼 너는? 너 개인으로 뭔가를 해서 해결 가능 해?"
 "……."
 "하."
 
 설참이 말이 없자 장신의 남자가 기가 찬 듯 비웃으며 말했다.

 "야. 정신 차려."
 "뭐?"
 "당장 눈 앞의 적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얘기를 해? 내부의 적 하나만 있어도 깨지는 판에 내분? 장난치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니…!"
 "야. 너네 구레아쪽 군대도 해결 못 하고 너도 방법을 못 찾는 데 네가 돌아가서 뭐 할 건데? 얘기를 해? 헛소리 하지 마. 그냥 발 빼."

 장신의 남자의 말에 설참은 힘이 다 빠진 목소리임에도 언성을 높였다.

 "지금 군인한테 전쟁터에서 도망치라는 것이냐?"
 "아니."

퍽 

 "납치할 건데?"

 장신의 남자는 설참이 몸이 약해져 방심한 사이에 기절시켜버렸다.

  

 "…뭐야."

 설참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구레아로 장신의 남자가 데려 온 상태였다.

 "깼냐?"
 "……." 
 "원만하게 너 빼냈으니까 걱정 말고."
 "……."
 "너 회복이나 하러 가자. 전쟁 때문에 일반 병원에서는 너 못 받아주니까 어디 가서 치료받아야 될 것 같다."
 "……."
 "홍화씨 집에 가는 게 낫겠지?"
 "……."
 "근데 집에 없더라. 옥실이가 찾으러 갔는데 너한테 물어서 같이 오라는 말만 남기고 갔거든? 너 홍화 어디 갔는지 아냐?"
 "……."
 "야. 홍화씨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아냐고."
 "……."

 설참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기껏 살려주려고 왔더니. 무시를 하네, 무시를 해. 어차피 망할 전쟁 다음을 노리는 게 낫지."

 그 말에 설참이 버럭 화를 냈다.

 "네가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냐!?"
 "너보단 잘 알거든? 빨리 홍화씨한테 가자고."
 
 설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홍화를 보러 가지."
 
 그러고는 설참은 앞장서서 장신의 남자를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설참은 으리으리한 저택 단지를 지나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홍화 만나러 간다며?"
 "잔말 말고 따라와."

 설참은 의아해하는 장신의 남자에게 그리 말하고는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미로 같은 길들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계시오?"

 설참이 부르자 문이 열리고 꾀죄죄한 몰골의 남자가 문을 열었다. 그는 어린 딸을 안고 있다가 설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으며 뛰어 나왔다.

 "오셨군요! 안 그래도 소식을 전해 듣고 찾으려 간다는 것을 말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에 옥실이 집 안에서 튀어나왔다.
 설참과 남자가 근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장신의 남자가 옥실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기 누구 집이야?"

 옥실이 장신의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설참이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홍화 남편의 집이다."
 "…뭐?"

 뜻밖의 소식에 장신의 남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결혼…했었어…?"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집 안에서 여자 아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애도…있어…?"

 장신의 남자가 연이어 접한 충격적인 사실에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안에 있던 홍화가 아이를 안아 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언니!"
 
 그 모습을 본 장신의 남자는 입을 떡 벌렸다.

 "지, 진짜 남편?"
 "네. 홍화씨의 아이랑 남편이요."

 옥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신의 남자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말을 더듬으며 홍화에게 물었다.

 "왜, 왜 말 안 했어요?"
 "뭐를요?"
 "겨,결혼 했다고……."
 
 그 말에 홍화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숨기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왜 제가 혼인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죠? 제가 노처녀로 보였나요?"
 "아, 아니 그게……."

 장신의 남자가 말을 더듬는 동안 옥실이 장신의 남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처음 홍화를 봤을 때 이미 성인이었는데 왜 미혼일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마타마이니, 구레아에서, 이 시대에?"

 이 시기에 마타마이니에서는 대부분이 결혼을 하고, 또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홍화 정도면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신의 남자 혼자만 당연하게 결혼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특이한 경우였다.

 "아니, 야. 알았으면 나한테 얘기 좀 해주지!"
 "안 물어 봤잖아요."
 "와……. 너는 진짜 할 말이 없다. 왜 사람을 바보로 만드냐?"
 "제가 언제요? 그냥 본인이 바보인 거죠."
 "이야. 너는 진짜……."

 장신의 남자가 옥실과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다른 이들은 다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뭐가요?"
 "홍화 같이 손꼽히는 부자가, 그것도 대저택도 따로 있는데 어떻게 남편과 애는 이런 곳에 살 수 있어?"
 "글쎄요. 모르겠네요."
 "이상하지 않아?"

 장신의 남자가 의아한듯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옥실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별로요? 확률적으로 충분히 유추 가능하고 가능성 있는 일 같지 않아요?"
 "가능성 있는 일이라니? 뭐가?"
 "은신을 위해 마련한 집일 수도 있잖아요? 신변 보호를 위해 남편과 애를 여기에 숨겨둔 걸지도 모르구요."
 "…하."

 옥실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옥실아. 돌아가자."
 "아직 못 가는 데요?"
 "아직 몸 안 좋냐?"
 "네."
 "아아……. 젠장."

 장신의 남자는 이번에는 짜증을 냈다.
 옥실은 덤덤하게 장신의 남자에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은혜나 갚아요."
 "은혜?"
 "왕자님한테 은혜 입었잖아요."
 "아 그랬었지. 근데 어떻게?"
 "홍화가 왕자님을 만나러 갈 일이 있나 봐요. 설참은 치료하는 동안 아마 은신하면서 여기서 머무를 것 같고요. 저도 그동안 회복하고 있을게요."
 
 옥실의 제안에 장신의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방 안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렸다.

 "우선 집 안으로 들어가죠."

 옥실의 말에 일단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는 홍화가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하고 있었다. 방안의 모두가 입도 뻥긋 못한 채로 홍화와 설참의 눈치를 살피며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겁니까!?"
 "지금 당장 간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냥 이제 군대에 발 담그지 말고 쉬시란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혹사하지 마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홍화가 안타까움에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참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게 그만두라는 말과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 둘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몸으로 뭘 더 하시겠다는 겁니까?"
 "죽어도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다. 못 죽거나 안 죽는 다면 그건 해방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설참의 말에 홍화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나는 다시는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치른 장례가 마지막이다. 다시 치를 필요 없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홍화의 목소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준답니까! 언니가 아니라 다른 이들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굳이 언니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그런 말 마라!"

 설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참고 있었지만, 방금 홍화의 말 때문에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가 노력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또한 내가 노력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아준다 했느냐?"

 설참이 다시금 목소리를 낮츠며 단호하게 말했다.

 "역사가 알아줄 것이다. 역사에서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네가 기억하지 않느냐? 그리고 심지어 저 녀석, 그리고 이 자리에 네 남편, 그리고 같이 싸웠던 동지는 기억 할 것이 아니냐?"
 "…끝이 안 좋으면 어쩔 겁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우주 9구역과 우리의 격차를!" 

 홍화가 솔찍한 속내를 내비치며 말했다.

 "저도 돕고는 있지만, 이 일들에 회의감이 듭니다. 어쩔 때는 우리의 노력과 스러져간 이들의 희생이 아무 의미 없는 희생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노력과 희생이 가치 있습니까? 결국 최악의 상황이 와버리면… 그냥 헛된 일 밖에 더 됩니까?"
 
 홍화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심이 깊었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꼈던 시간들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다 헛된 일이라도 내가 안다."

 설참은 홍화의 질문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이러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가치 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니냐?"
 
 설참의 대답에 홍화는 참지 못하고 대답 없이,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홍화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러세요."
 "미안하다."

 설참은 눈물을 흘리는 홍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위로하듯 안아줬다. 매혹적인 분 냄새 위로 코를 찌르는 피와 땀 냄새, 흙냄새, 화약 냄새가 뒤엉켜 다가왔다.
 
 "나를 아껴주는 네게 항상 마음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 하고 있다."
 "…적어도 정말로 미안하다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여기 계시지요. 부탁입니다."
 "…알겠다."

 설참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홍화는 눈물을 닦고는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장신의 남자에게 말했다.

 "…왕자님이 부르십니다. 같이 가시지요."
 "어? 어어."

 홍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장신의 남자는 허둥지둥 홍화를 따라나섰다. 

 "시계 잊어버리지 마요. 멀리 가니까 꼭 잘 들고 있어요."

 옥실이 따라나서는 장신의 남자에게 당부했다.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급히 홍화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왕자를 보러 가는 동안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장신의 남자는 그저 냉랭한 분위기의 홍화의 눈치를 살피며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주 9구역으로 가는 비행 함선을 타고 게이트를 통과 할 때쯤이 돼서야 장신의 남자가 말을 붙였다.

 "왕자님은 9구역에 있는 건가?"
 "네. 항상 기회가 될 때 마다 마타마이니로 돌아오고 싶어 하시죠. 그들이 안 놔주고 있지만요."

 그들이 대화 하는 사이에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거대한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들은 함선 내에 승객의 안전을 위해 살포된 가스 덕에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우주 9구역 중심 은하 근처에 와 있었다. 승객들이 함선에서 자체적으로 들려주는 음악 소리에 따라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자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곧 살아남은 우주 9구역, 칼에 도착합니다. 목적지는 중심 은하단 엑스, 리버 은하의 중앙 행성의 17번 게이트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승객 여러분은 지상에 착륙하기 전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마십시오. 정차 후 빠진 짐이 없는지 확인 후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장신의 남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와, 나 여기 처음 와 봐."
 "처음이라고요?"
 "응. 엄청 번화하다던데."
 "그렇죠."

 홍화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함선이 착륙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짐을 챙겨서 문 앞으로 갔다. 함선의 문이 열렸다.

 

 "마타마이니랑 완전 다르네."

 장신의 남자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말했다.

 그 때는 마타마이니 행성의 4266년의 겨울 무렵이었다. 장신의 남자가 우주 9구역에 도착했을 때, 중심 은하단 엑스, 그 중에서도 리버 은하의 중앙 행성 17게이트 주변은 또한 시기적으로 겨울을 맞이해 있었다. 

 찢어진 우주의 남은 조각이라 불리는 우주 9구역. 가장 진보된 문명을 가졌다는 명성 답게 아름답고 깔끔하게 디자인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소음이 적은 소형 항공 기체가 곳곳에 날아다녔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도 마타마이니와는 시대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세련된 복장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빨리 가죠. 구경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홍화가 멍 하니 구경을 하고 있는 장신의 남자를 재촉했다.
 홍화는 장신의 남자를 데리고 음료를 파는 가게로 향했다. 제법 북적이는 홀을 지나 개인실들이 마련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방들 중에 한 곳에서 음료를 음미하고 있던 왕자가 보였다.
 왕자는 그들을 밝은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그들은 자리에 앉으며 안부인사를 주고 받았다. 곧 음료가 각자 앞에 나왔다.

 "조만간 9구역이 기존의 우주 연맹에서 탈퇴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네." 
  
 왕자가 소식을 전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의미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동맹은 이제 휴지 조각이라는 말이지." 
  
 왕자의 말에 홍화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한 건가요?"
 "결정은 났다네. 아직 공표만 안 하고 있을 뿐."
 "…마타마이니의 다른 국가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적어도 이전과 같지는 않을 거라 본다네. 동맹국들을 공격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가만히 있진 않겠지."

 왕자가 그렇게 말하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홍화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주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다는 걸까요?"
 "단독으로 벌이진 않겠지. 지금까지의 동맹을 깨고 새로운 판을 짤 생각인 것 같아 보이네. 아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아즈국이나 다른 국가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새로운 판!"

 홍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홍화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인지 손이 컵에 부딪혀 엎질러버렸다.

 "앗!"

 컵은 넘어지는 방향 때문에 옆에 앉아있던 장신의 남자의 옷에 엎질러졌다.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홍화에게 다급히 닦을 것을 건네줬다.

 "고마워요."

 홍화가 닦으며 말했다.

 "잠시 화장실에 좀……."

 장신의 남자는 엎질러진 음료를 좀 씻어내러 화장실에 가버렸다.

 그가 화장실에 가고 나자, 왕자가 홍화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 자 말인데… 그대에게 연정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 안 하는가?"
 "눈치 채셨군요."
 "알고 있었나?"
 "당연히 알고 있었죠."
 
 홍화의 대답에 왕자는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했다.

 "잘 해 볼 생각은 없는가?
 "잘 해 볼 생각이라……."

 홍화는 아련하게 먼 곳을 응시하듯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제가 일 평생 본 이들 중 가장 멋진 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랑과 정절을 약속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갖고는 놀 생각입니다."

 홍화의 대답에 왕자는 깜짝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허! 그래?"

 왕자는 아까보다 더 흥미로운 듯 입가에 이제는 눈에 확 띌만한 웃음이 입꼬리에 걸렸다. 
 홍화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괘씸하거든요."
 
 때마침 장신의 남자가 자리로 돌아왔다.

 "괜찮으신가요?"

 홍화가 아까는 꺼내지도 않았던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씻고 와서 물이 흥건하게 묻은 앞섶을 닦아주려 했다. 그리고 그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장신의 남자가 당황하며 막았다.

 "괘, 괜찮아. 이, 이 정도는……." 
 "어머. 제가 지 아비가 있다고 하니 이젠 부담스러워지신겝니까?"
 
 왕자가 그걸 보고 웃음을 참고 있다가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어차피 가짜이지 않나?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자네를 숨기기 위한."

 아무래도 왕자는 홍화가 갖고 노는 꼴을 더 보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응? 그게 무슨 말?"

 장신의 남자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홍화를 바라봤다.
 홍화는 부정하지 않고 흐흥 하고 웃고만 있었다.

 "…설마 위장 결혼?"

 장신의 남자가 물었다.

 "그래도 지아비인 건 변하지 않지요."

 홍화의 대꾸에 장신의 남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버렸다.
 왕자는 자신 앞에서 괜히 언쟁이라도 나면 귀찮아지니 말을 돌렸다.

 "…어쨌든 아까 말이 멈췄었네만, 어쨌거나 크게 새 판을 짜려고 하는 건 확실하다네."

 왕자의 말에 홍화가 말했다.

 "결국은 기존의 질서를 깨고 자기 멋대로 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그러면 왕자님은 괜찮으신가요?"

 홍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자는 홍화의 질문에 갑자기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그래서 자네들을 불렀다네."
 "네?"
 "그들이 나를 결혼시킬 생각인 것 같네."

 왕자의 말에 홍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말씀이십니까?"
 "아마 9구역 국가들의 왕가들의 공주 하나와 결혼 시킬 생각인 것 같네."
 "그런……."
 "도와주게. 나는 9구역 출신의 그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네."
 "…알겠습니다. 9구역이 크게 화를 내지 않으면서 왕자님과 연이 닿을 만한 이를 찾아보겠습니다."

 

 홍화와 장신의 남자는 다시 마타마이니로 돌아가는 비행체를 타기 위한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구레아가 아니라 지난이라고 했지?"
 "네. 나즈(도시 이름)로 가야 합니다."
 
 둘은 마타마이니로 돌아가는 비행체에 타기 전, 식당에 잠시 들렀다.
 장신의 남자가 음식을 앞에 두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홍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말을 안 한 거지?"
 "진짜 남편이 아니라니요? 혼인을 한 것은 맞습니다."
 "아이도 홍화씨 애가 아니라며."
 "혼인 한 관계이니 제 아이가 맞는데요?"
 "같이 산 적이 있긴 해? 집도 따로 있잖아."
 "종종 들립니다. 식사나 하시지요. 늦겠습니다."
 
 홍화의 대답에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신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신의 남자가 음식을 입에 한 입도 안 대고 있자 결국 홍화가 수저를 내려놓고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홍화가 되려 뻔뻔하게 나오자 장신의 남자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답답한 속을 비우듯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는 물었다.

 "…왜 내가 그러고 있는 걸 거절하지 않았어? 내가 홍화씨한테 마음 있는 걸 몰랐던 건 아니잖아?"
 "제가 속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냐?"
 "제 친절을 오해하신 게 아니고요?"
 "뭐?"

 홍화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을 했다.

 "그쪽도 저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그래서 저도 그리 대했을 뿐입니다."
 "그, 그건……."
 "항상 애매하게 구셨던 것은 그 쪽입니다. 연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건가 싶으면 어느 순간 물러나고, 또 한없이 제게 잘해주시는 듯 마음을 다 하는 듯 하다가 또 물러나고. 제가 어떻게 했어야 했습니까?"

 홍화의 말에 장신의 그저 남자는 말문이 꽉 막혀 버렸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홍화가 좋으면서도 그래서는 안 됐었기 때문에…….

 "제대로 표현을 했더라면 저도 확실히 했을 겁니다."
 "나, 나는…!"

 장신의 남자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결국 또 말을 돌려버렸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하."

 이 순간 마저 물러서자 홍화는 어이없어서 비웃음만 나왔다. 홍화는 냉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가 궁금한가요?"
 "어?"
 "몸 한 번 섞은 적 없고, 입 한 번 맞춘 적 없습니다. 됐나요? 이게 궁금했던 게 아닌가요?"

 홍화답지 않은 직설적인 말에 장신의 남자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깜빡거렸다.
 
 "그래도 제가 혼인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홍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본 그 누구보다 멋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전 그 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 목숨을 다 바쳐도 후회 없겠다는 생각으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제 마음속에 없습니다." 
 
 홍화의 말에 장신의 남자는 입도 뻥긋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당신이 제게 직접적으로 단 한 번이라도 표현했더라면 들었을 말입니다. 제 진심이고요."

 홍화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수저를 들며 말했다.

 "빨리 식사나 하시지요. 늦겠습니다."

 

 둘은 한껏 더 어색해진 모습으로 나즈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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